홍역(紅疫) / 이은규
누군가 두고 간 가을이
홍역처럼 붉다, 라는 문장을 썼다 지운다
무엇이든 늦된 아이
병(病)에는 누구보다 눈이 밝아
눈이 붉어지도록 밝아
왜 병은 저곳이 아닌 이곳에 도착했을까
답이 없는 질문과 질문이 없는 답을 떠올린다
안으로부터 차오르는 열매
나는 병력을 지우고
붉은 몸을 잘 표백시키는 사람들을
조금 부러워했나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조금 부러워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돌아오는 절기
혼자 부르는 돌림노래에 공을 들이고
그것만은, 포기하지 않기 위해 손을 모을 뿐
저기 핑그르르 수면을 도는 단풍잎
같은 병을 다르게 앓지 못한 우리들은
왜 약속 없이 나누는 역병처럼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서만 생각했을까
붉어지는 열매 핑— 도는 울음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아니라
그래서 나는 오늘
질문이 없는 답에 쉽게 고개를 끄덕여버린
오랜 부끄러움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
잘못된 문장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멀리서 가까이서 도착할 소식들에 귀를 열고
이제 질문이 없는 답을 내내 의심할 것
홍역처럼 붉다, 라는 문장을 지웠다 쓴다
누군가 두고 간 가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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