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해준 것들 / 김경미
목련꽃들 족제비처럼 빠르게 지나가도
천천히 숨 쉬게 해주었다
물뿌리개 같은 회색 기와지붕
낡은 전축 기울여 빗소리 뿌려주었다
소의 어금니가 되게 해주었다
그 말들 가두느라 입안에 지푸라기 가득해도
머리 새빨갛게 물들인 여자
붉은 장미꽃 가득한 담벼락 지날 때
둘 다 고요하게 해주었다
다섯 번의 눈물과 후회를 두 번의 열매로 계산해주었다
너무 오래 달라붙지 말라고
나뭇잎들 기러기같이 몇 달씩 떼어놔주었다
과일과 오후의 그늘 중 어느 쪽이 더 입에 맞는지 알려주었다
외로운 곳에 가게 해주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코를 잃고 잊혀진 곳
슬로베니아냐고 자꾸 질문받는 곳
그 마을 광장 뒤뜰의 묘비명들
무엇보다
그 무엇보다
꼭 죽이고 싶던 사람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시집 <밤의 입국 심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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