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슬픔이 해준 것들 / 김경미

다연바람숲 2015. 10. 23. 15:15

 

 

 

 

슬픔이 해준 것들 / 김경미

 

 

목련꽃들 족제비처럼 빠르게 지나가도

천천히 숨 쉬게 해주었다

 

물뿌리개 같은 회색 기와지붕

낡은 전축 기울여 빗소리 뿌려주었다

 

소의 어금니가 되게 해주었다

그 말들 가두느라 입안에 지푸라기 가득해도

 

머리 새빨갛게 물들인 여자

붉은 장미꽃 가득한 담벼락 지날 때

둘 다 고요하게 해주었다

 

다섯 번의 눈물과 후회를 두 번의 열매로 계산해주었다

 

너무 오래 달라붙지 말라고

나뭇잎들 기러기같이 몇 달씩 떼어놔주었다

 

과일과 오후의 그늘 중 어느 쪽이 더 입에 맞는지 알려주었다

 

외로운 곳에 가게 해주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코를 잃고 잊혀진 곳

슬로베니아냐고 자꾸 질문받는 곳

그 마을 광장 뒤뜰의 묘비명들

 

무엇보다

 

그 무엇보다

꼭 죽이고 싶던 사람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시집 <밤의 입국 심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