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끌림 - 풍경

청주 다연, 나는 가을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다연바람숲 2015. 8. 13. 15:02

 

 

 

 

 

 

 

 

 

 

 

 

북강변 / 이병률

 

 

 나는 가을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 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한밤중의 이 나비 떼는

남쪽에서 온 무리겠지만

서둘러 수면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면서

무조건 이해하려 하였습니다

 

당신이 마당에서 자꾸 감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팔월의 비를 맞느라 할 말이 많은 감이었을 겁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감을 따서 한쪽에 쌓아두었더니

나무의 키가 훌쩍 높아졌다며

팽팽하게 웃었습니다

 

길은 막히고

당신을 사랑한 지 이틀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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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 지나고 거짓말처럼 바람이 서늘해졌습니다.

아직 한낮의 무더위는 꺽이지 않았지만 아침 저녁으로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나는 가을이 참 좋습니다.

여름과 가을이 서로 손을 맞잡은 이즈음이 또 좋습니다.

떠나야할 사람과 그 자리를 찾아들 사람이 문 앞에 두 손 잡고 서서 나누는 인사같은,

반갑고 아쉬운 풍경과 마음들이 이 계절 속에는 있습니다.

 

아직도를 건너가고 있는 여름엔 버릴 것이 많아 아팠습니다.

아픈 시절을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 역시도 절룩거리느라 많이 뒤뚱거렸습니다.

상처입은 사람들은 짓무른 상처 위에 쏟아지는 자책을 견디느라 폭염에 더 아픈 신음을 했고,

하루에 한 번 물을 주어도 자꾸 시들어가는 여름 날의 꽃같은 시절을 건너는 사람들은

메마른 마음 위에 잡초같은 희망을 키우느라 간간히 쏟아지는 소나기를 기원하며 살았고,

발을 데일 듯 쏟아지는 불볕 아래 한산해진 거리는 정지된 화면을 연출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버려지거나 잊혀졌고 친절한 위안이나 변명들은 홀로 높인 자존감의 벽을 끝내 넘지 못했습니다.

미안한 일들이 더러 국지성 호우처럼 쏟아졌지만 그 누구에게도 미안하다는 인사는 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지금도를 건너가고 있는 여름날에 버린 기억들이 한낮의 햇살처럼 따끔거리지만

이제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드는 가을이 깊을 즈음엔 그마저도 잊혀진 계절의 추억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제는 잡초가 자란 뒷뜰의 풀섶에서 귀뚜라미가 울었습니다.

어제는 지는 꽃과 피는 꽃이 어우러져 흐드러진 이웃집 꽃밭에서 고추잠자리를 보았습니다.

시절이 시절이다보니 계절없이 꽃도 피고 벌레도 울지만 계절을 떠올리는 습관까지 바꿀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나는 가을이 참 좋습니다.

이 계절에 나도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 하려다가 그만둡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뜨겁게 살아 온 한 철을 삭이고 받아들여 제 색깔을 지니기때문일 겁니다.

살아온 날의 무게를 제 스스로 겸손하게 내려놓고 가벼워지기때문일 겁니다.

 

여름이 가을의 손을 놓고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갈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가을이 혼자 돌아가는 선풍기의 날개를 세우고 제가 가져온 바람을 들여놓을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거기 안녕하신가요?

가을이 오고있어 나도 안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