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여자 없는 남자들 / 무라카미 하루키

다연바람숲 2014. 10. 8. 18:47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게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해도. _ (드라이브 마이 카) ,49쪽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건, 특히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뭐랄까, 보다 총체적인 문제야. 더 애매하고, 더 제멋대로고, 더 서글픈 거야. _(드라이브 마이 카), 37쪽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속속들이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예요. 상대가 어떤 여자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가후쿠 씨만의 고유한 맹점이 아닐 거예요. 만일 그게 맹점이라면 우리는 모두 비슷한 맹점을 안고서 살아가고 있는 거겠죠. _(드라이브 마이 카), 50쪽

 

나는 자주 똑같은 꿈을 꿔. 나와 아키가 배에 타고 있어. 기나긴 항해를 하는 커다란 배야. 우리는 단둘이 작은 선실에 있고, 밤늦은 시간이라 둥근 창 밖으로 보름달이 보여. 그런데 그 달은 투명하고 깨끗한 얼음으로 만들어졌어. 아래 절반은 바다에 잠겨 있고. ‘저건 달처럼 보이지만 실은 얼음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한 이십 센티미터쯤이야.’ 아키가 내게 알려줘. ‘그래서 아침이 와서 해가 뜨면 녹아버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동안 잘 봐두는 게 좋아.’ _(예스터데이), 96~97쪽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면 내 마음도 따라서 당겨집니다.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어요. 이런 건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감정입니다. 그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요. 이대로 점점 그리움이 깊어지면 나는 대체 어떻게 될까 하고. _(독립기관), 145~146쪽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자기 마음을 컨트롤할 수 없고, 그래서 불합리한 힘에 휘둘리는 기분이 든다. _(독립기관), 146쪽

 

칠성장어는 매우 칠성장어다운 생각을 해. 칠성장어다운 주제를 칠성장어다운 문맥으로. 하지만 그걸 우리가 쓰는 언어로 바꿔놓을 수는 없어. 그건 물 속에 있는 것들을 위한 생각이니까. _ (셰에라자드) , 182

 

열일곱 살의 내가 그의 어떤 점에 그토록 깊이 빠졌었는지, 그것조차 잘 생각나지 않아. 인생이란 묘한 거야. 한때는 엄청나게 찬란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것이,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혹은 바라보는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놀랄 만큼 빛이 바래 보이는 거야. 내 눈이 대체 뭘 보고 있었나 싶어서 어이가 없어져. _(셰에라자드), 211~212쪽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현실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 그것이 여자들이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셰에라자드는 그에게 그것을 넉넉히, 그야말로 무한정 내주었다. 그 사실이, 그리고 그것을 언젠가는 반드시 잃게 되리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그를 슬프게 했다. _(셰에라자드), 214쪽

 

 

아무리 텅 비었을지라도 그것은 아직까지는 나의 마음이다. 어렴풋하게나마 거기에는 사람들의 온기가 남아 있다. 몇 가지 개인적인 기억이 바닷가 말뚝에 엉킨 해초처럼 말없이 만조를 기다리고 있다. 몇 가지 감정은 베어내면 필시 붉은 피를 흘리리라. 아직은 그 마음을 영문 모를 곳으로 떠나보내 헤매게 할 수는 없다. _(기노) ,268쪽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젠 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모퉁이를 돌면 그것이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_(여자 없는 남자들), 327쪽

 

여자없는 남자들이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 후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

어쨌거나 당신은 그렇게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다. 그리고 한번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버리면 그 고독의 빛은 당신 몸 깊숙이 배어든다.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의 얼룩처럼. 당신이 아무리 전문적인 가정학 지식을 풍부하게 갖췄다 해도, 그 얼룩을 지우는 일은 끔찍하게 어려운 작업이다. 시간과 함께 색은 다소 바랠지 모르지만 얼룩은 아마 당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그곳에, 어디까지나 얼룩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당신은 느리게 색이 바래가는 그 얼룩과 함께, 그 다의적인 윤곽과 함께 생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_ (여자 없는 남자들) , 330 , 331쪽

 

한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때로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여자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_(여자 없는 남자들) , 335, 336쪽

 

 

무라카미 하루키 < 여자 없는 남자들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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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두번째 고독과 첫번째 고독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다."

 

책 속의 한 줄 이 말은 어쩌면,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 남자들의 고독을 한 마디로 표현해낸 말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거나 원하지않거나, 의도하거나 의도하지않거나, 자의로든 타의로든 혼자가되는 때가 있다.

인간 본연의 원초적인 고독이 첫번째 고독이라면 그 혹은 그녀, 누군가의 상실로 인한 고독은 두번째 고독이 될 것이다.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던 빈자리와 무엇인가 자리하고 있다가 비워진 빈자리는 그 본질부터 다른 것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 속의 남자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 남자들이다.

사별하여 혼자가 된 남자가 있고, 끝내 이루지못한 사람과 사랑에 대한 기억 속의 남자가 있고, 사랑에 빠졌으나 배신 당해 죽음을 선택한 남자가 있고, 현실에 있으면서 현실을 무효하게 모든 걸 내어주는 그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남자가 있고, 아내의 외도로 혼자가 된 남자가 있고. . . . 그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불합리한 힘에 이끌려 소용돌이치다 결국에는 두번째 고독의 주인공이 된 남자들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게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해도."

 

때로 어떤 진실은, 불편함을 낳는다.

내가 아닌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설령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모든 사랑의 불편한 정의다.

불합리하고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해서 그 혹은 , 그녀를 향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고 침묵해야할 때가 있다는 것이 또한 사랑의 맹점이다. 그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해도 다른 누군가가 그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반박할 수 없는 사랑의 암묵적 결론이다.

 

" 한번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버리면 그 고독의 빛은 당신 몸 깊숙이 배어든다.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의 얼룩처럼. 당신이 아무리 전문적인 가정학 지식을 풍부하게 갖췄다 해도, 그 얼룩을 지우는 일은 끔찍하게 어려운 작업이다. 시간과 함께 색은 다소 바랠지 모르지만 얼룩은 아마 당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그곳에, 어디까지나 얼룩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당신은 느리게 색이 바래가는 그 얼룩과 함께, 그 다의적인 윤곽과 함께 생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

 

무라카미 하루키가 9년만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청소년기의 방황과 사랑이 아닌, 남자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결혼을 했고 가정이 있고 , 중년의 사랑이라는 것이, 또 사랑의 상실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륜에 근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매 단편마다 소재가 되는 불륜의 이유가 될 것이다. 불륜에 기저한 사랑과 상실에 대하여, 어찌보면 다소 통속적일 수 있는 소재를 끌어내 이토록 내밀하게 접근하고 심리적으로 표현해내는 건 무라카미 하루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키 자신도 결국엔 나이와 상관없이 사랑과 상실에 초연할 수 없는 남자이며 버리거나 남겨짐으로써 고독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을, 그리하여 여자없는 남자가 된 한사람일 것이고, 이 글. . . 여자 없는 남자들은 하루키 그 자신의 고독한 자화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길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아무도 없는 것,

누군가와 함께 걷던 길을 오늘은 혼자 걷는 것,

기억만이 얼룩처럼 오늘을 잠식 하는 것,

그 무엇도 변한 것은 없으나 모든 것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

 

그리고 어느 날, 남자 없는 여자가 되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