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 공지영

다연바람숲 2013. 8. 5. 00:22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보고 싶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나의 사랑이 깊어도 이유 없는 헤어짐은 있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없어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사람의 마음이란 게 아무 노력 없이도 움직일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움직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 속에 있었을 때 더 아름다운 사람도 있다는 것을.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 사람도 기억도 이렇게 흘러가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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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사랑은 사랑이 아닐까? 나이를 많이 먹은 지금 나는 고개를 저어봅니다. 잘못된 것이었다 해도 그것 역시 사랑일 수는 없을까요? 그것이 비참하고 쓸쓸하고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현실만 남기고 끝났다 해도, 나는 그것을 이제 사랑이었다고 이름 붙여주고 싶습니다.

나를 버리고, 빗물 고인 거리에 철벅거리며 엎어진 내게 일별도 남기지 않은 채 가버렸던 그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며칠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지요. 그가 죽는다는데 어쩌면 그가 나를 모욕하고 그가 나를 버리고 가버렸던 날들만 떠오르다니. 저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리고 그의 죽음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진실이었습니다. 죽음조차도 우리를 쉬운 용서의 길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인간의 기억이란 이토록 끈질기며 이기적이란 것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다만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직 다 용서할 수 없다 해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다행입니다. 우리 생애 한 번이라도 진정한 용서를 이룰 수 있다면, 그 힘겨운 피안에 다다를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이별로 향하는 길이라 해도 걸어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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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 좋은 일이 많습니다. 조금 무뎌졌고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그렇습니다. 이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고통이 와도 언젠가는, 설사 조금 오래 걸려도, 그것이 지나갈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가 일어날 수도 있고, 비겁한 위인과 순결한 배반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다고 꼭 그대를 내 곁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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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잃어버리는 일이 꼭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기억 위로 세월이 덮이면 때로는 그것이 추억이 될 테니까요. 삶은 우리에게 가끔 깨우쳐줍니다. 머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마음이 주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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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면 진정한 외로움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 후에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거리를 기웃거리는 외로움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신에게 정직해지려고 애쓰다 보면 언제나 외롭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럴 때 그 외로움은 나를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친구가 말했습니다. 당하면 외로움이고 선택하면 고독이라고. 우리는 외로우니까 글을 쓰고 외로우니까 좋은 책을 뒤적입니다. 외로우니까 그리워하고 외로우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어떤 시인의 말대로 외로우니까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사람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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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에는 고통이 뒤따른다는 사실이, 인간이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필히 물레방아처럼 많은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게는 여전히 달갑지 않지만 이제는 볼멘소리로 그냥, 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끔 저 자신에게 묻기도 합니다. 정말 그렇게 울어보았나, 정말 물레방아처럼 온몸으로 울어보았나, 설사 그것이 고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그렇게 온몸으로……온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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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그가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 괴테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일상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고 정체되지 않으려 몸부림쳤습니다. 자신이 무슨 직위에 있든지 그는 노력하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고 일흔이 넘도록 아름다운 소녀를 넘보았으니 괴롭고 힘겨웠을 겁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방황하지 않아도 될 것을. 잉크에 펜을 찍어 한 자 한 자 문장을 완성해 나가는 동안 그가 아무리 천재라 한들 그는 노력해야만 했을 것이고 또 방황했으리라, 생각하면서 어쩌면 그러한 과정을 거친 것만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력하면서 방황할 것인지, 머무르면서 안주할 것인지 노년을 준비하면서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머무를 수 없는 삶의 비정함을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평화는 잔디처럼 초록빛이 아니라고요. 자유는 바람처럼 투명한 빛이 아니라고, 그것은 그저 핏빛일 뿐이라고.

 

 

공지영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