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끌림 - 풍경

새해 두어 마디 말씀 - 고은

다연바람숲 2013. 1. 2. 21:23

 

 새해 두어 마디 말씀 - 고은

 

새해 왔다고 지난날보다
껑충껑충 뛰어
端午날 열일곱짜리 풋가슴 널뛰기로
하루 아침에
찬란한 세상에 닿기야 하리오?

새해도 여느 여느 새해인지라
궂은 일 못된 일 거푸 있을 터이고
때로 그런 것들을
칼로 베이듯 잘라버리는
해와 같은 웃음소리 있을 터이니

우리 아낙네들이시여
쥔 양반과 다툴 때 조금만 다투고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니라
눈을 부릅떠서
지지리 못난 사내 짓 고쳐 주시압
에끼 못난 것! 철썩 불기라도 때리시압
그 뿐 아니라
우리 아낙네들이시여

우리 집만 문 잠그고 으리으리 살 게 아니라
더러는 지나가는 이나 이웃이나
잘 안되는 듯하면
뭐 크게 떠벌릴 건 없고
그냥 수숫대 수수하게 도우며 살 일이야요
안 그래요? 우리 아낙네들이시여
예로부터 변하는 것 많아도
그 가운데 안변하는 심지 하나 들어 있어서
그 슬기 심지로 우리 아낙네들 크낙한 사랑이나 훤히 밝아지이다
마침내 우리 세상 훤히훤히 밝아지이다 *

 

 

*

 

새해왔다고 하루 아침 세상 개벽하듯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야할까요.

어제같은 오늘, 또 여늬 날과 같은 여늬 날이겠지요.

그럼에도 새날은 새날인 것이지요.

새해는 새해인 것이지요.

 

새해 벽두부터 아주 먼길을 다녀왔지요.

눈보라가 그치나싶으면 안개, 안개가 걷히나 싶으면 눈보라...

어둠과 안개와 눈보라와 눈쌓인 길을 오래오래 천천히 달리고 달려 집에 도착했을땐

세상의 온갖 풍파는 다 헤치고 격은 것 같아 이제 시작하는 한해가 은근 안심도 되었지요.

목숨을 거는 일보다 필사적인 일도 있을까, 이보다 더 할 수는 없다,

배짱도 좋게 눈 아래로 세상이 만만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새해를 열어갑니다.

시인 고은님이 넌지시 건네주는 두어 마디 말씀도 어찌 그리 좋은지요.

세상에 변하는 것 많고 많아도 안변하는 심지 하나, 슬기의 심지를 돋워보는 거지요.

그렇게 수수하게 웃는 날, 웃어서 행복해지는 시간을 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