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끌림 - 풍경

동지, 눈 내리는 날의 생각

다연바람숲 2012. 12. 21. 14:37

 

어제는 햇살이 그리도 환하고 곱더니 오늘 창밖엔 참 포근포근하게 흰눈이 내립니다.

사뿐 한겹 쌓이면 그 한겹을 지우고 가는 자동차들의 길이 도로 위에 선명합니다.

 

그제는 강원도하고도 화천, 이기자 부대의 이등병 아들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었습니다.

이러저런 그동안의 안부와 내년 1월로 예정되었던 휴가가 3월로 연기되었다는 말을 전하면서

그녀석 뜬금없이 던지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어머니,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은 하지마셔요."

 

강원도 화천, 지독하리만큼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라지요.

겨울의 군생활이라는 것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쌓인 눈을 치우다 하루가 간다지요.

하늘이 흐려져도 겁이날만큼 그 스무살 생에, 눈이 낭만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뼈아프게 느낀다지요.

손이 시리고 발이 시리고, 사회에서였다면 잔꾀 많은 녀석이 이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도 할 것이겠지만

명령 아니면 복종 밖엔 없는 군생활에서 이 첫겨울이 신병훈련 이후 아마 가장 큰 고비가 되고 있을 터이지요.

 

그 녀석 신병훈련소 입소하던 날, 동기들 사이로 사라져가는 뒷모습 보면서 울지않았지요.

5주 훈련마치고 수료식날, 먹고자고 불려간 몸이 홀쭉하게 야위고 까먛게 그을린 모습 보면서도 눈물 흘리지않았지요. 

약해지지마라. 엄살 부리지 마라. 강해져라. 앞으로 살아가야할 험한 세상으로의 첫발일 뿐이다.

나는 내 아들 약하게 키운 적 없다. 너는 능히 선임의 건빵 속에 있는 별사탕도 뺏어먹을 수 있는 녀석이다.

너는 누가 뭐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기고 똑똑하고 멋있는 나의 아들이다. 나는 내 아들을 믿는다.

힘들지? 엄마로서 이런 약한 말따위는 하지않겠다. 훈련 8주 동안 인터넷으로 손편지로 수없이 강해지란 말만 적어 보냈었지요.

모든 훈련마치고 수료식날, 아빠는 그 아이 어깨를 안고 눈물을 글썽였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나는 그 어깨를 다독였을 뿐이지요.

그런 엄마였으니 녀석에게 엄마는 그저 모질고 독하고 강한 사람이었겠지요.

자대 배치받고 전화 올 때마다 아빠, 누나, 동생의 안부는 살뜰하게 챙기면서 " 엄마는 안 물어볼꺼니? " 하면

" 에이 엄마는 제가 걱정 안해도 씩씩하게 잘 지내시잖아요"  하면서 웃지요. 그러면서 "보고싶어요" 하면 그 넉살이 또 마냥 어여쁜거지요.

 

그런 녀석이 "어머니,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은 하지마셔요." 하는데 가슴 짜안했지요.

" 아들아.. 올해의 눈은 내게도 강원도로 군대 보낸 엄마의 눈이야"

"일기예보를 보면 충청도보다 강원도 소식이 먼저 들어오고 눈이 오면 울아들 힘들겠다를 먼저 생각해"

" 알겠니? 아무리 네게 강한 척하고 강해지라고 해도 그것이 진짜 엄마의 마음이야"

"알지요. 어머니, 제가 어머니 마음 왜 모르겠어요."

역시나 대화가 잘 통하는 걸 보면 얼굴도 성격도 나를 꼭 닮은 내 아들인거지요.

자식! 갈수록 너무 멋있어져서 저걸 어쩌나 행복한 걱정도 하는거지요.

 

그 아들이 아름답게만 바라보지말라던 눈이 지금 창밖에 포근포근하게 내립니다.

한 송이를 비껴 또 한송이, 그 어긋나고 어긋나면서 풍경을 그려내는 눈송이들을 가만 바라봅니다.

서로의 길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서로 부대끼면 스며들어 하나가 되면서 살아가는 우주의 법칙이 저 풍경 속에 있습니다.

지금은 눈을 치우느라 그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우리 아들 녀석도 저 풍경 속의 의미를 깨닫는 날이 오겠지요.

참 아름답지만 차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눈이 내리는 동지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