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끌림 - 풍경

다연의 그 남자, 당신을 사랑합니다

다연바람숲 2013. 1. 10. 18:29

 

 

 

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 한다.

 

 

*

 

아침 일찍 일을 보러나가 기진맥진 한나절이 되어 돌아 온 지아비 얼굴을 보다 가슴이 철렁했지요.

철딱서니 마누라때문에 실속없는 일에 휘말려 몇며칠 속을 썩더니 얼굴이 반쪽이 되었지요.

어지간한 사내 같으면 큰소리도 치고 화도 한 번 낼만한 일인데, 내 마누라 맞나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준게 다이지요.

어제 미루어놓은 일까지 아침 일찍부터 몰아하느라 지친 그 남자 손 잡아주다가 또 가슴이 짜안했지요.

무거운 거 들고나는 일이라 손이 거칠어져 잡은 손이 거칠거칠 트고 갈라져 가슴이 무너질 듯 아팠지요.

그 손에 크림 흠뻑 발라 문질러주고 비벼주면서 요몇칠 그 속도 이 손 같았겠다 또 마음이 울컥 하는 것이지요.

 

헛똑똑이 마누라 때문에 말도 안되는 구설수에 올라 시비가 되어도

언제나 힘들게 혼자 일은 다하고 그 공 터무니 없게 마누라에게 모두 주어져도

누가 받으면 어때, 누가 책임지면 어때 그조차 자신의 복이고 업이라는 사내, 그 사람이 내 지아비지요.

저 위의 시, 너를 사랑한다 라는 시... 지아비를 여의고 강은교님이 쓴 망부가라지요.

함께 있을 땐 몰랐던, 미처 전하지 못했던,  떠나간 그 지아비에게 보내는 애틋한 마음자락이라지요.

저도 그땐 몰랐지요. 오늘이 아닌 그땐 몰랐지요.

함께 지내 온 세월이 우리 안에 있는 시간을 함께 밟으며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 온 길이라는 걸,

빈의자에 서로를 앉혀 쉬게하고 서로의 신발을 세상을 향해 놓아주며 함께 걸어 온 길이라는 걸,

설령 세상이 내게 등지고 손가락질을 할지라도 내 곁에서 나를 지켜줄 단 한사람이 있다는 걸,

나는 그 가장 크고 감사한 사실을 자주 잊고 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더 늦지않게 말하고 싶은거지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래된 시간 > 끌림 -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미곶에서  (0) 2013.01.13
나는 간다  (0) 2013.01.13
새해 두어 마디 말씀 - 고은  (0) 2013.01.02
다연이 드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선물입니다  (0) 2012.12.31
메리 크리스마스!!  (0) 2012.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