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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 목가구의 종류와 특징

다연바람숲 2012. 9. 11. 15:08

 

 

전통가구는 세 가지 분류로 나누어지는데 모든 주택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생활공간에 따라 크게 안방 가구, 사랑방 가구, 부엌 가구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

안방은 주로 여성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곳이어서 기능적인 가구들로 배치되었는데, 장이나 농을 제외하면 여성취향의 자잘한 기물이 놓여지게 마련이었다. 안방가구는 무늬 결이 아름다운 느티나무나 먹감나무를 사용하거나, 나전칠기, 화각 등의 기법으로 화려한 채색을 가미했다. 또 주석과 백통의 금구장식과 정교한 길상문양으로 호화롭게 장식하여 질박한 것을 애호한 사랑방 가구와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이러한 안방가구에는 개인과 가정의 부귀와 수복을 소망하던 조선조 여인들의 미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안방가구로는 장, 농, 반닫이 등 의류 수납용과 귀중품 보관용의 함과 각게수리, 바느질용 반짇그릇, 몸을 단장하는데 쓰이는 빗접, 좌경 등이 있다.

사랑방은 선비들이 학문을 닦고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기에 문인적인 취향을 짙게 반영한다. 선비들은 청빈이란 유교적 덕목을 숭상하고 실천하였기 때문에 사랑방에 놓여지는 가구나 문방구들은 질박하고 격조가 높은 것을 취하였다. 따라서 시각적으로부담을 주지 않는 소박한 질감의 오동나무, 소나무가 주재료로 사용되었으며 번잡한 문양이나 번쩍이는 금구장식 및 울긋불긋한 칠은 피하였다.

사랑방 가구에는 서안, 경상 등의 책상류와 문갑, 사방탁자, 서가, 책장, 연상 등의 문방 가구와 각종 서류를 보관하기 위한 문서함, 책을 넣어 두는 크고 작은 궤, 상비약을 넣어 두는 약장, 귀중품을 보관하는 각게수리 등이 포함된다. 또한 의대를 보관하는 의걸이장도 사랑방 가구에 속한다.

무거운 유기그릇, 사기그릇을 식기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부엌가구는 그러한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하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또 전통적인 가옥구조에서는 식사를 하는 방들이 부엌으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음식을 담아 나르거나 놓고 먹는 상의 종류가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부엌가구로는 뒤주, 찬장, 찬탁, 소반 등이 있으며 가구는 아니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각종 함지류가 있다.

이밖에 부유한 양반이나 토호의 대저택에서는 곳간 세간과 사당 설비를 추가할 수도 있다.

곳간 세간으로서 뒤주와 크고 작은 궤가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 진설탁자도 곳간에 보관하였다.

사당에는제상과 교의를 두었으며 부유한 가정에서는 주고(벽장)를 설치하여 고인의 서적, 유품, 제구 등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주고를 설치하지 못하는 가정에서는 큰 궤 두 개를 마련하여 사당의 동쪽과 서쪽 벽에 한 구씩 배치하였다. 그래서 서쪽 궤에는 서적과 의복류를, 동쪽 궤에는 제기를 넣어 보관하였다. 사당이 없는 서민 주택에서는 제구를 대청의 들보에 설치한 시렁 위에, 제기는 궤에 담아 다락 등에보관하였다.

가구는 쓰이는 용도에 따라 기거용 가구, 수장용 가구, 문방 가구, 주방 가구, 의식용가구 등으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재료에 따라 오동문갑, 화류장, 먹감농, 자개장 등으로 불렀으며 형태에 따라 아기장, 원앙장, 벙어리문갑 등 편리하고 쉬운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렀다.


궤(櫃)

나무로 된 장방형의 상자를 가리키며 궤에는 윗닫이와 반닫이(앞닫이)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천판(윗면)을 앞뒤로 절개하여 앞쪽을 문판으로 삼은 것을 위쪽에 문이 있다 하여 윗닫이라고 하며, 앞면을 상하로 이등분하여 위쪽을 문판으로 삼은 것을 반닫이 또는 앞닫이라 한다.

돈궤는 윗닫이와 형태는 같으나 크기가 휠씬 작으며 윗면이 절개된 부위 중앙에 엽전이 들어갈 수 있도록 장방형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궤 가운데 윗닫이는 책, 문서, 의복, 피륙, 건어물, 그릇, 제기, 활자등을 보관하는 다목적 가구로서 수납된 물품의 종류에 따라 사랑방, 다락, 광, 사당 등에 놓고 사용하였으며 관청에서도 많이 이용한 가구이다.

궤는 문(뚜껑)이 널판으로 되어 운두가 없으며 문판에 붙은 경첩이 천판과 연결되어 포개 놓을 수 없다.

앞면엔 문이 달린 반닫이 가운데 특이한 형태는 내부를 좌우 칸으로 나누어 두 개의 문판을 나란히 단 원앙 반닫이와 문을 중앙에 작게 낸 개구멍 반닫이의 두 가지이다. 원앙 반닫이는 부부가 해로하라는 의미로서 결혼 예물로 만들며 부유한 집에서는 내외의 수의를 보관하기 위해서 만들기도 한다.

궤는 견고하고 물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어 각 가정마다 여러 구를 비치하였다.다양한 수요로 지역적 특색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필요에의 주문 제작한 것은 일정한 양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 예로 책탁 반닫이, 반닫이장 등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양식이 다른 가구와 결합하여 독특한 양식을 나타태고 있다.

궤의 기원에 관한 중국 기록으로는 하나라와 주나라의 두 가지 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탈해왕이 길이 20자, 너비 13자의 궤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지금까지 삼국시대의 일상 생활용 가구가 발견된 예는 없으나 고분에서 출토된 목관과 부장용 궤의 예로 미루어 왕실 또는 신분이 높은 계층에서는 특수한 용도로 나무 궤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옷장

의류를 보관하는 가구로서 중, 상류 이상의 가정 내방 가구를 대표하는 우리나라의 고유한 용어이다. 머릿장(단층장), 2층장, 3층장, 의걸이장 드물게는 4층장, 5층장도 있으며 크기에 따라서는 소형장을 아기장이라고도 부르며 형태에 따라 원앙장, 경첩의 형태에 따라 나비장, 불로초장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현존하는 유물들은 대개 나전칠기나 화각장과 같이 울긋불긋하고 호사스러운 기법에 백통과 같은 금구장식을 하고 여러 길상문양을 새기고 있는 등 안방가구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한복은 평면 재단으로 만들어져 접어서 보관하여도 그 형태가 변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옷장에는 상당량의 옷을 접어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남성들의 관복은 귀중하게 여겨 별도의 관복함에 넣어 보관하였다. 또는 유상(버들로 엮은 상자)과 소상(대나무로 엮어 채색을 하지 않은 상자류), 궤에 보관하였으며 방 한 쪽에 맨 횃대에 걸어 두기도 하였다.

장은 한자로는 수궤 - 곧 세우는 궤하고 한다. 이 용어에서 알수 있듯이 장은 궤가 발전된 것이다. 조선시대 중기 이전에는 2층 3층장이 없었으나 처음 궤에서 양식이 변화되어 단층장인 머릿장의 형태가 되고 이것이 2층 또는 3층으로 변화된 듯하다.

우리나라 장의 앞면은 쇠목과 동자주에 의해 분할되어 머름칸, 벽손(쥐벽손), 문판, 서랍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이 나타내는 독특한 나뭇결은 세련된 조화와 무궁한 변화미를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양식의 가구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수 없다. 내실용장의 다리는 층수에 상관없이 낮고 굽은 앙가마제 형태를 하여 안정감을 준다.

단층장인 머릿장은 쇠목과 동자주에 의해 분할되어 머름칸, 벽손, 문칸, 서랍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층 또는 3층장의 하단과 동일한 형태로 되어 있다.

이불장은 그 명칭이 비록 장이지만 낮은 머릿장 양식의 단층장이 설치되거나 장이 설치되지 않고 쇠목과 동자주로 구획된 쥐벽칸과 서랍만 설치되는 것이 통례이다. 이불장은 윗면(개판)에 이불을 개어 얹는 용도로 쓰였으므로 부출(기둥)과 쇠목이 전체 가구의 크기에 비해 두껍다. 이불장은 자녀들의 방에 둔다. 2층 또는 3층장은 옷을 넣는 전형적인 내방 가구로서 안방에 둔다.

의걸이장은 조선시대 말기에 나타난 형태로 하단에는 낮은 장 또는 반닫이가 부착되고 그 위로 긴 장이 설치된 2층 구조의 장이다. 위쪽의 내부에 횃대가 달려 있어 옷을 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금침장은 의걸이장과 형태가 유사하나 내부에 횃대가 없으며 일반장에 비해 옆폭이 약간 넓다. 하단에는 대부분 낮은 장이 부착되어 있다.

모든 장의 내면에는 종이를 발랐는데 고급장에는 당지를, 일반장에는 반물을 들인 청색지를 발랐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황지를 바르는 것이 유행하였으며 일제 때에는 노루지를 발랐다.



각게수리, 약장

각게수리는 안방과 사랑방에서 함께 쓰였던 단층장 양식의 가구이다. 여닫이문 앞에 여러 개의 서랍이 설치된 일종의 금고로서 귀중품 문서 등을 보관하는데 사용하였으며 약장으로도 이용하였다.

우리나라의 현존 각게수리에는 내면 서랍에 약재 이름이 적힌 것이 있는데 이러한 각게수리 약장은 대부분 가정에서 상비용으로 쓰인 것이다. 또 내부에 몇 개의 서랍이 있는 것은 귀중품 보관용이다.

직업 한의사들은 많은 서랍이 달린 약장을 사용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여닫이문 속에 여러 개의 서랍이 있는 백안주에 약재를 보관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극약이 아닌 일반 약재는 노출된 서랍에 보관하였고 극약은 잠금 장치가 달린 장 또는 그 안에 내재해 있는 서랍에 보관함으로써 좀 더 안전하고 간편하게 약재관리를 하였다.




농은 장과 더불어 내실용 가구를 대표하며 아래 위짝이 분리된다는 것이 장과의 다른점이다. 농은 채롱이나 버들고리와 같이 상자 형태에서 연유하였으나, 두세 짝을 포개놓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각 농짝마다 여닫기 편리하도록 문을 앞쪽에 붙였을 것이다. 또한 옮기기 쉽게 하기 위하여 옆널에 들쇠를 달았으며 바닥의 온기를 막기 위하여 다리를 따로 붙여서 방바다과 격리시켰다. 농의 판재로는 오동나무, 팽나무, 느릅나무 등이 많이 사용되는 편이다.

형태에 따라서는 수농장, 개판농이라 부르며 재료에 따라 먹감나무농, 자개농, 삿자리농 등으로 분류한다. 수장농은 쇠목과 동자주의 구획이 없으며 서랍도 없고 판재로만 구성된 목제농의 원형이다. 개판농은 대한제국시대에 제작되기 시작한 전통 목가구의막내격인 가구로서 천판이 돌출되어 이름붙여진 농이다. 삿자리농은 나무 또는 대나무의 골격에 대를 마치 삿자리처럼 엮어 만든 농을 가리킨다. 이밖에 크기가 같은 함을 두 개 포개어 놓은 것을 함농이라고 한다.

농은 원래 대 또는 싸리로 엮어 만든 죽기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죽기나 유기는 밑짝이 얕은 것을 상, 밑짝이 뚜껑보다 깊은 것을 농이라 구분한다. 뚜껑이 위에 있으며 시렁 위에 올려 두거나 크기가 같은 것을 두세 개 포개어 놓고 사용하기도 하였다.





함은 깊은 밑짝에 운두가 얕은 뚜껑을 경첩으로 연결하여 여닫을 수 있도록 한 상자이다. 귀중품을 넣는 용도로 쓰였기 때문에 자물쇠로 채우도록 되어 있다. 자물쇠는뚜껑에 부착된 긴 ?침대(길채 또는 낙목이라고도 함)의 중간에 달린 고리(길목)와 몸체에 박힌 두 배목의 고리를 연결하여 잠그도록 되어 있다. 양측 널에는 들쇠가 있어 이동하기에 편하도록 하였다. 함은 요즈음도 혼인 때 신랑 집에서 혼서지와 채단을 넣어 신부 집에 보내는 데 사용된다.

제작방법이 다양하며 나전칠기함이나 화각함뿐 아니라 대나무올을 염색하여 엮은 채사, 대나무 껍질을 붙인 피죽상자등 특수하게 제작한 것들이 있다. 고려시대의 예로는나전칠기 경함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것으로는 수납물품에 따라 옷을 넣던 의함, 약함, 문서함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고 19세기에는 농과 함께 혼수용으로 반드시 필요한 품목이었다.



빗접과 좌경

빗접은 퇴발낭(사방 80~90센티미터의 유지로 머리를 빗을 때 무릎 앞에 펴 빠지는 머리카락을 받아 모아 종횡으로 3번 접어 보관), 빗, 빗솔, 빗치개 등을 보관하는 제구로서 유리 거울이 나오기 이전에 사용된 머리 단장용 제구이다. 좌경은 유리 거울이 보급되면서 빗접에 거울을 부착한 것으로 빗접이 발전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빗접은 소함이라고도 하며 주칠, 나전 칠기 제품이 많은 편이다.

좌경은 빗접보다 나중에 나타난 양식으로 뚜껑의 반을 절개하여 경첩을 달고 뚜껑 안쪽에 거울을 부착하여 뚜껑을 열면 거울을 세울 수 있도록 된 것과 뚜껑이 통판으로 되어 돌려 열고 뚜껑이 받침 다리가 되어 거울을 세우도록 된 형태가 있다. 수장 공간으로 한두 개의 서랍이 달린 것, 거울 밑에 공간이 있어 빗과 빗치개 등을 보관하도록 된 것, 거울만 달린 것 등 여러 가지 양식이 있다. 서랍이 없거나 하나만 있는것은 대부분 사랑방에서 쓰던 것이다.



등화구

19세기 말 석유가 보급 되기 전에 초나 식물성 기름에 불을 밝히던 기구들에는 촛대등잔걸이, 좌등 등이 있었다. 초를 곶던 촛대는 신라와 고려 때의 청동제품이 있으나기둥나무의 상하에 기름접시와 기름받이 그릇을 이중으로 걸도록 만든 등잔걸이는 19세기 이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뼈대를 나무로 깎아서 주칠을 한 좌등이 궁중유물로남아있다.



평상

조선 중기 이후 온돌의 보급으로 평상을 사용하는 경우가 점차 줄었으나 궁중, 사찰사대부 및 선비 계층, 살림에서 손을 뗀 노부인 등 상류계층 사람들은 평상을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의 실내용 평상은 예외적인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다리와 난간이 낮고 바닥은 목재의 띠살 또는 대쪽을 대었으며 두 개를 맞붙여 사용하도록 된 짝평상이 특징이다. 여름에는 띠살 사이로 통풍이 되어 시원하며 겨울에는 온돌의 온기가 띠살 사이로 올라와 따뜻하다. 평상 위에 여름에는 등자리를, 겨울에는 보료나 담요를 깔았다. 이평상은 두쪽으로 나뉘어져 이동하기에 편하며 겨울에는 방에, 여름에는 누마루에 두었으며 때에 따라 밖에서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인조때는 온돌이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평상의 사용이 줄었으나 최근까지도 애용되고 있다.



탁자와 의자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궁궐, 관공서에서의 집무와 연회, 재력 있는 선비, 사대부의 서재에는 사용되었다. 정방형, 원형, 접도록 된 것 등이 있으며 대로 만든 의자는 여름철에 사용되었다. 특히 중국제의 등직 좌판이 달린 의자를 상품으로 여겼다.

의자 앞에는 연궤라는 중국식 탁자를 설치하였다. 좁고 긴 이 탁자 위에는 붓과 벼루, 서택 등을 두었다. 이밖에 대라고 하는 연회용 소탁자가 있다.



궤는 앉았을 때 겨드랑이 밑에 괴어 편히 기대게 하는 제구이다. 궤의 양식은 크기(총길이 70~75센티미터, 높이 30센티미터 정도)가 크고 장식은 운문영지등을 음양각하였으며 양측에 투공된 판각의 다리를 대었다. 일반인들의 사제 팔걸이는 규모가 작으며 투각한 세 개의 다리로 상하 판을 연결시켰고 위아래의 구별없이 사용할 수 있다.


서안/경상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쓰는 용도의 평좌식 책상으로 경상 역시 서안의 일종이나 좌우양쪽 귀퉁이가 두루마기형으로 올라가는 형태상의 차이가 있다. 상판의 길이가 짧은것과 긴 것이 있는데 장소와 용도에 맞추어 독서용으로는 길이가 짧은 것을 사용하고 두루마리에 글을 쓸 때에는 긴 것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작은방과 침실에는 작은 서안을 비치하였다.

상판 아래에는 선반이나 서랍을 달았고 상판이 곧고 판판한 것을 격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상판의 양끝이 위로 들렸으며 다리와 서랍에 조각 장식을 한 경상은 사찰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민간에서도 사용되었다.

특이한 양식으로는 휴대용 서안을 들 수 있다. 휴대용 서안은 서랍이 있어 지필묵을 넣을 수 있고 다리를 접을 수 있게 되어 있어 휴대에 간편하도록 설계되었다. 보통 소나무로 만든 것이 가장 많으며 제주도의 산유자나무, 호남의 먹감나무 및 황해도의 해묵은 뽕나무도 재료로 많이 사용된다. 주로 나뭇결이 좋은 무늬목 중에서 단단하고 정갈한 것을 취하여 간결하고 소박한 품격으로 만든다.

서안의 예로는 고려시대의 청동제 경상이나 고려 말기의 나한도와 조선시대 풍속화등에서 부분적으로 보이지만, 현존하는 대부분의 유물은 대개 19세기 이후의 것으로 규격화된 것이 없고 형태도 각양 각색이다.


연갑과 연상

연갑은 벼루만을 담도록 한 것이며 연상은 벼루와 종이, 먹 등을 함께 비치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위쪽에는 벼루가 손상되지 않도록 벼루집을 설치하고 그 밑의 서랍이나 빈 공간에는 여러 문방용품을 넣어둔다. 그 쓰임새로 보아 책상 옆에 비치되며, 형태는 뚜껑이나 서랍의 유무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어 같은 모양의 것이 없다. 현존하는 유물의 대다수는 19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문갑

각종 문방용품과 문서 등을 총괄하여 보관하기 위한 가구로서 문구갑의 준말이다.

문갑은 평좌 생활에 알맞은 책상 높이 또는 문지방 높이의 나즈막하고 가로로 긴 형태로 벽면을 따라 길게 한쌍을 놓고 사용한다. 문방에 필요한 소품들을 넣기 위한 작은 서랍과 선반으로 이루어진 것과 서랍과 선반을 네 짝의 두껍닫이 문으로 감춘 형태도 있다. 이와 같이 네짝의 두껍닫이 문으로 된 문갑을 벙어리문갑이라고 한다. 천판 위에는 필통, 연적, 수석, 난분 등을 늘어 놓아 진열대의 구실도 한다. 서랍으로 칸을 나누는 시원한 면처리와 간결한 구조 및 기능상 자잘한 물건을 치워서 실내를 정갈하게 하도록 배려한 것은 선비정신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사방탁자와 탁자장

서책이나 완상품을 진설하도록 3,4층의 층널로 되거나 그 가운데 한 층을 장으로 막은 것을 사방탁자라 하며, 하단 또는 중앙의 한두층에 장을 설치하고 나머지 측널은 세면이 판재로 막혀 앞면만이 뚫린 양식을 탁자장이라고 한다. 시렁위에는 서권, 화축, 화병, 취우, 호, 향로, 다완 등 문방 기구를 늘어놓는 문방의 총책임자로서 서실의 사치스런 완상물이다.


책갑과 책장

책을 귀하게 여겼던 조선시대 선비, 사대부들은 귀중본일 경우 오동나무 책갑에 넣어 보관하였다. 책갑 가운데 큰 것은 내면을 2, 3칸으로 구획하여 전면에 한 짝 문을 내고 문의 중앙에 책명을 가하였다. 한질이 여러권으로 된 경우 8, 9갑에 이르도록 수량이 많았다. 책장은 책을 넣어 간수하기 위한 수납용품으로, 문짝을 열어 젖히는 서장이나 찬탁모양으로 층층이 선반을 얹어 책을 포개두던 서가도 있다.

대체로 2, 3층으로 이루어졌으며 책을 넣기 편리하도록 머름칸, 쥐벽칸을 생략하거나 작게 하여 매층마다 두짝의 문을 달았다. 내면에는 종이를 바르고 외면은 자연스러운 나뭇결이 잘 드러나도록 황칠을 하였다.경우에 따라서는 여의두문, 안상문이나 시구를 문판에 조각하기도 하였다. 책장의 문판 재료는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오동나무를 주재료로 사용하였으며 기능적으로 무거운 책을 넣어둘수 있는 튼튼한 것이 애호되었다. 금속 장식은 구조적으로 꼭 필요한 부위에 최소한의 것을 사용하여 인위적인 장식성을 배제하였다.


뒤주

뒤주는 도궤, 두주, 두도 등으로도 표기하는 곡물을 담아 두는 가구로서 크기가 다양해 크기에 따라 쌀과 잡곡을 구분해 보관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안쪽에 담긴 곡식의 양을 측정할수 있도록 그 크기가 어느 정도 규격화 되어 있었다. 소나무를 주재료로 하며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네 기둥에 홈을 파서 두꺼운 널이 껴물리도록 짠다. 시우쇠 장석으로 표면을 꾸며 묵직한 중량감을 느끼게 한다. 천판은 이등분하여 위로 곡식을 꺼내도록 한 형태가 경기, 서울 지역에서 사용되는 기본형이다. 앞면은 무늬가 좋은 나무의 통판을 끼웠으며 측면과 후면은 두세 쪽의 판자를 대었다. 뒤주는 상류 계층의 대저택에서는 찬방에 두고 쓰지만 중하류 계층에서는 대청에 두고 양념과 손쉽게 꺼낼 수 있는 밑반찬을 담은 단지 등을 뒤주 위에 올려 놓았다.


찬장과 찬탁

찬장은 그릇과 음식을 보관하는 2, 3층으로 된 장으로 놋그릇, 사기그릇 등의 하중을 받기 위해 튼튼하게 짜여진 점이 특징이다.찬장 중에는 문턱이 층널과 평면이 되도록 하고 문은 창호지를 바른 살창의 미닫이나 분합문을 단 찬장이 있으며 일반 옷장처럼 머름칸과 벽손(쥐벽칸)을 설치한 찬장도 있다. 장식은 대부분 무쇠로 된 것을 사용하였다.

찬탁은 반찬이나 찬거리 등을 얹어두는 두세 층의 탁자로 소나무, 잣나무를 사용하여 굵은 각목으로 기둥을 삼고 층널 역시 두꺼운 것이 특색이다. 중간에 장을 설치한 주방 전용의 찬탁도 있으며 제사때 마련한 음식을 제상으로 옮겨놓기 전에 올려두는 용도로 쓰이는 진설탁자는 층널로만 구성되어 있다. 찬탁은 상제례 용구를 만들 때 함께 만들며 찬탁을 사용하는 계층은 부유한 양반가이다.



제상과 향안, 교의

제상은 넓은 천판과 가는 원주 또는 각주로 이루어진 다리, 다리의 기능적인 보광과 장식을 위한 운각, 좌우의 중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판은 네 변에 두꺼운 변자를 대고 가운데 여러 개의 판을 끼운 턱솔짜임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판 밑에는 판을 보강하기 위해서 횡목을 대었다.

제상의 외형상 형태는 단순한 운각 형태와 운각에 초엽을 곁들인 초엽문 운각의 두가지 양식이 있다. 또 기능적으로는 접을 수 있도록 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접도록 된 기제사용 제상은 항상 사당 안에 설치해 두는 제상과는 달리 제사가 끝난 뒤 다른곳에 보관해 두어야 하므로 보관상의 편리함을 생각하여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생긴 양식이다. 조립식 제상은 다리를 몸체에서 분리, 보관하는 형태와 다리를 떼어 방두산지로 고정하는 형태, 그리고 다리, 천판, 중대를 모두 분리하여 보관하는 세자기 형식이 있다.

향안은 제탁과 형태나 짜임기법이 유사하나 서랍이 달린 것과 중대에 층널을 얹은 형태가 있으며 크기는 향제구를 놓기에 충분한 크기로 제작되었다.

교의는 원래 접을 수 있는 의자이나 제례용 교의는 접을 수 없으며 제사 때 신위를 모시는 일종의 의자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교의는 앉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보다 신주를 봉안하기 위한 목적에서 좌판이 좁으며 또 신좌의 위치가 제상보다 높아야 하므로 다리가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