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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김소연 〈고통을 발명하다〉

다연바람숲 2011. 12. 9. 19:01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김소연 〈고통을 발명하다〉
중심에서 미끄러진 여성의 삶을 노래하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나잇값만큼 깊어지는 여자의 우울과
  우울을 모독하고 싶은 악의 때문에
 
  창문 꼭꼭 닫아둔 여자의 베란다에선
  여린 식물들부터 차례대로 말라 죽기 시작했다
  볕이 너무 좋았으므로 식물들은
  과식을 하고 배가 터져 죽게 된 것이다
 
  악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여자의 노련함 때문에
  한 개의 꼬리가 아홉 개의 꼬리로 둔갑한다
  꼬리를 감추기 위해 여자는
  그림자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챈다
  아스팔트에 내동댕이를 친다
 
  자기 기억을 비워내기 위해
  심장을 꺼내어 말리는 오후
  자기 슬픔을 비워내기 위해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헹구는 오후
 
  여자는 혼잣말을 한다
  왜 나는 기억이나 슬픔 같은 것으로도 살이 찌나
  왜 나의 방은 추억에 불만 켜도 흥등가가 되나
 
  늙어가는 몸 때문이 아니라
  나이만큼 무한 증식하는 추억 때문에
  여자의 심장이 비만증에 걸린 오후
  드디어 여자는 코끼리로 진화했음을 안다
 
  진화에 대해서라면 여자도 할 말이 있었다
  한때 여자도 텅 빈 육체로 가볍게 나는
  작고 작은 새 한 마리였으므로
 
  이제 여자는 과거에 대해서만
  겨우 할 말이 있을 뿐이다

 
 
  김소연의 시집 《눈물이라는 뼈》와 엘렌 식수의 책 《메두사의 웃음》을 나란히 놓고 읽는다. 김소연은 여자에 대하여 쓴다. 여자의 우울과 악의에 대해서.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쳐진 ‘바깥’에서, ‘죽음’으로 응고된 운명에서 돌아와서, 즉 “매번 모든 것에 대해 유죄”(엘렌 식수, 앞의 책)인 상태에서 돌아와서 시를 쓴다. “사람들은 여성의 육체를 광장의 불안스런 이방인, 환자 혹은 죽음으로 만들어버렸다. 여성의 육체는 흔히 품행이 나쁜 동반자, 억압의 원인이며 장소였다.”(엘렌 식수, 앞의 책) 여자들은 변방에서 돌아온다. 그러나 귀환은 미완인 채 끝난다. 여자들의 삶은 중심에 이르지 못하고 바깥으로 미끄러진다. 남성이 해, 문화, 낮, 지적인 것, 로고스, 형태, 씨앗이라면 여성은 달, 자연, 밤, 감정적인 것, 파토스, 물질, 땅이다. 여자는 남자들이 만든 광장을 떠도는 이방인이자 환자다. 여자는 배척당한 다른 것, 지배당하는 식민지, 의식 안에서 억압받는 그림자다. 여자는 그 자체로 금지된 자기 몸 안에 그림자를 품는다. 여자는 자기 안의 그림자를 끌어내 징벌한다. 이때 그림자는 자아의 일부이면서 자아에 편입되기를 거부당한 또 다른 자아다. “꼬리를 감추기 위해 여자는 / 그림자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챈다 / 아스팔트에 내동댕이를 친다”는 구절은 물론 표면적으로는 여자로 나이 들며 사는 삶이 녹록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더 깊이 보자면, 여성 스스로 행하는 자기에게 벌주기, 여성 살해의 무의식적인 흔적이다. 여성적 글쓰기는 해와 낮의 일들이 아니라 달과 밤의 이야기를 쓰는 것, 즉 이성의 역사가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무의식의 서사를 쓰는 것이다.
 
  여성으로 살아남았다 해도 상흔은 내부에 있다. “여자는 혼잣말을 한다 / 왜 나는 기억이나 슬픔같은 것으로도 살이 찌나 / 왜 나의 방은 추억에 불만 켜도 흥등가가 되나”라는 구절에는 추방되고 배제된 자의 상흔이 엿보인다. 딸로 태어나지만 세월이 가면서 타자에 의해서 어느덧 나이든 ‘여자’로 발명된다. 여자는 제도와 규범들이 촘촘하게 만든 멍에와 검열들 때문에, 자주 여자 아닌 그 무엇으로 “둔갑”한다. 여자는 전설 속에서 “아홉 개의 꼬리가 달린” 여우로 “둔갑”한다. 여자는 무한 증식하는 추억을 먹고 점점 더 뚱뚱해진다. 한때 가벼운 작은 새였던 여자는 기억과 추억을 꾸역꾸역 몸으로 밀어 넣으며 코끼리로 진화하는 것이다. 코끼리로 진화한 여자들은 때때로 ‘중년 여자’라는 새로운 생물학적 학명을 얻는다. 이 여자는 스스로의 딸이면서 어머니이고, 자매들의 연대다. “엄마는 딸에게 거울이 되어주었지만 / 거울은 원하는 표정만을 비추는 공범자를 자처했다”(〈경대와 창문〉)에 따르면 딸-어머니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서로가 원하는 표정만을 비추는 공범자다.
 
  엘렌 식수는 여성이 날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밝혀낸다. 엘렌 식수는 날아간다는 것은 “여성의 동작이다. 언어 속에서 날고, 언어를 날아가게 하고, 수세기 이전부터 우리 여자들은 모두 비상에 대해서 많은 기법의 기술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여성은 무의식에서 날면서-훔치면서 살아간다. 여성 억압적 세계 안에서 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새가 공중을 날기 위해 제 뼛속을 비우듯 여성도 날기 위해 저를 텅 비운다.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 여성은 새와 도둑이라는 은유가 나왔을 것이다. 여자는 심장을 꺼내 말리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헹군다. 김소연의 여자들은, 이미, 젊지 않다. “육포처럼 말라버린 엄마의 발목을 만지며 / 내 생이 그녀의 생을 다 먹어버린 건 아닌지 / 속이 더 부룩하고 신트림이 난다”(〈경대와 창문〉) 날마다 신트림을 하면서 엄마의 생을 고갈시킨 것은 자신이 아닐지 반성하면서 그 반성 위에 나이 들고 있다는 저의 자각을 겹쳐보는 것이다.
 
  여성성과 나이듦에 대한 자의식이 유난하게 자주 드러나 있는 《눈물이라는 뼈》는 시인이 마흔줄에 접어들면서 낸 시집이다. 정확하게는 마흔 두 살에 낸 시집이다. “바람을 간호하던 암늑대의 긴 혓바닥이 나뭇가지처럼 딱딱해질 때, 비로소 아이는 늑대의 섭생을 이해하는 한 그루 어른이 되는 거래. 그때 바람은 떠났던 숲으로 돌아가지 못해 더 큰 소리로 운대. 눈물이 사라진 어른들을 믿을 자신이 없어, 아이도 모로 누워 남몰래 운대. 밤새 흘러내린 눈물로 마당이 파이기 시작하면, 바람은 사라지고, 새로운 돌부리들이 죽순처럼 쑥쑥 마당을 뚫고 올라온대. 누군가는 그 돌을 주워 피리를 불고 누군가는 그 돌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대. 늑대가 섭생을 위해 밤새도록 무엇을 원했는지는,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면, 다, 알 수가 있대.”(〈눈물이라는 뼈〉) 아이는 자라서 “늑대의 섭생을 이해하는 한 그루 어른”이 된다. 이때 아이와 어른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계는 눈물의 있음과 없음의 차이다. 아이는 눈물이 있지만 어른은 눈물이 없다. 눈물은 여자와 아이들에게 많다. 그들은 내부에 마르지 않는 샘을 갖고 있다. 시인에 따르면 눈물은 연약한 존재의 방어 무기이자 자기 구제책이다(《마음사전》). 세계 안에서 가장 연약한 시인들의 방어 무기이자 자기 구제책은 시다. 그렇다면 여성-시인들에게 시와 눈물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김소연(1967~ )은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마음사전》이라는 책의 날개에 적힌 시인의 연보에 따르면 김소연은 경주에서 목장집 큰딸로 태어나 사람 등보다는 소 등에 업혀서 자라났다고 한다. 천칭좌. B형. 시인은 어린 시절 경주를 떠나 서울 망원동에 정착하는데, 그 시기는 명확치 않다. 청소년기에 시를 만나고, 교사들과는 자주 불화하며 지냈다고 하는데, 시를 알았기 때문에 규범에 묶어두려는 교사에 저항했는지, 아니면 교사에 대한 환멸이 그를 시로 이끌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가톨릭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뒤 시를 쓰기 시작해서 1993년에 계간지 〈현대시사상〉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김소연의 시는 엘렌 식수가 말한 대로 “흰 잉크”로 씌어진 시다.
 
  재기발랄한 시인 김소연이 “설거지통 앞 / 하얀 타일 위에다 / 밥그릇에 고인 물을 찍어 / 시 한 줄을 적어본다”(〈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라고 쓸 때 “여성 안에는 언제나 최소한 약간의 좋은 모유가 늘 남아 있다. 여성은 흰 잉크로 글을 쓴다.”(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라는 구절이 겹쳐진다. 소위 불의 연대라고 말하는 1980년대를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은 최승자에서 김행숙으로 이어지는 여성시의 흐름에서 그 중간쯤에 자리매김될 것이다. 그 사이에 김혜순, 황인숙, 나희덕, 김선우가 있을 터고, 그와 비슷한 언저리쯤에 진은영이나 이근화가 포진해 있을 것이다.

 
  사진 : 이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