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 이제니

다연바람숲 2011. 11. 13. 17:16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 이제니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늘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너의 수첩은 얇아질 대로 얇아진 채로 스프링만 튀어오를 태세. 나는 그래요. 쓰지 않고는 반성할 수 없어요.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너의 습관.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지친다. 지칠 만도 하다.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그러나 너는 등을 보인 채 창문 위에 뜻 모를 글자만 쓴다. 당연히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입김이라도 새어나오는 겨울이라면 의도한 대로 너는 네 존재의 고독을 타인에게 들킬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 언제부터 겨울이란 말이냐. 겨울이 오긴 오는 것이냐. 분통을 터뜨리는 척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중얼거린다. 너는 등을 보인 채 여전히 어깨를 들썩인다. 창문 위의 글자는 씌어지는 동시에 지워진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나도 그래요. 우리의 안녕은 이토록 다르거든요. 너는 들썩인다 들썩인다. 어깨를 들썩인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시집『아마도 아프리카』, 창비, 2010.

 



*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통용될 수 있는 만국 공통의 화제는 딱 두개가 있다. 하나는 아픔.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랑(이것의 실체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연애’라는 행적). 그런데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이 두 단어는 하나인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처럼 말이다.

  만약 지금 사랑에 빠져 있다면 이 시를 읽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 시를 읽으면, 지금 사랑에 빠진 당신이 절대로 연인에게 선물하지 말아야 할 선물이 꽃과 인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꽃은 사랑의 상징이 아니라, 곧 시들어버릴 감정의 유효기간이다. 인형은 낡아빠져 버릴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 감정의 먼지덩어리이다. 그 중에서도 배를 누르면 ‘알랴뷰’를 반복해서 말하는 그 바보같은 인형은 사랑의 종말이 도달할 일방통행의 미래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안녕 잘 가요”라든가 “들썩인다”, “척을”과 같은 단어의 반복은 바로 그 바보인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아름답지 않은 끝장을 보여준다.

  이제니의 새 시집이자 첫 시집에는 여러 편의 마음가는 작품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인용시를 고를 이유는 정작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는 구절을 읽고 나서이다. 그 구절을 통해 이 시인에게 사랑은 아픔과 동의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곳에서 읽은 적이 있다. “서로에게 홀딱 반한 두 연인이 욕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라도 언제나 그들 중 한 사람은 더 침착하고 덜 몰두해 있는 법이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한 사람은 수술집도의 또는 사형집행인의 역할 나머지 한 사람은 환자이거나 희생제물이다”라고 보들레르는 그의 산문집에 적은 바 있다. 이렇게 잔인한 것이 사랑의 실체이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우리가 사랑을 할 때는 이 점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더 어리석어졌다. -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