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해적 방송 / 박정대

다연바람숲 2011. 5. 21. 00:57

 

 

 

 

 적 방송  박정대

 

  

  긴 방파제를 따라 파도가 치지

 

  파도에 밀려 저녁이 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방송을 시작해

 

  당신은 듣고 있을까, 오로지 당신을 위해, 긴 긴 말레콘을 따라가며 부서지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 방송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면 찬찬이라는 음악과 함께 파도치는 말레콘의 풍경이 나오지

 

  그런 말레콘을 따라 오래도록 당신과 함께 걷고 싶었어

 

  아바나의 밤하늘엔 노란색 별들이 떠 있고 우리는 가난한 건물들 사이를 아무 걱정도 없이 걸어가겠지

 

  베로니카, 삶이 가난한 것은 건물들 때문이 아니야

 

  우리는 지금 저녁의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한 잔의 술을 마실 수도 있고 말레콘에 부서지는 파도의 음악 소리를 들을 수도 있잖아

 

  거리에는 가난한 악사들이 그들의 영혼을 연주하지

 

  선풍기가 없어도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의 가슴을 식혀줘, 겨울에도 우리는 춥지 않아, 베로니카, 당신의 따스한 가슴에

묻혀 잠들 수 있으니까

 

  저녁이 오면 낡고 오래된 말레콘에 앉아서 지나간 혁명이 찬란했다고 말하지는 말자, 삶은 결국 지나갈 테니까, 지나간 삶은 그래서 찬란할 테니까

 

  베로니카, 아직 따스한 내 손을 잡아줘, 당신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나를, 나의 혁명을 추억이라고 말하지 말아줘

 

  아직 내 마음의 말레콘에는 파도가 치고 별빛이 빛나고, 당신과 나는 작은 손전등 하나를 들고도 우리의 낡은 침낭 속으로 스며들 수 있으니까

  침낭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것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베로니카,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그냥 우리에게 망명해 버리자

 

  나는 지금부터 당신의 말레콘이야

 

  카리브해의 파도를 음악으로 바꿔 밤새도록 당신을 위한 단 하나의 해적방송을 할 테야

 

  당신만 들어주면 돼, 그러면 돼, 나는 밤새도록 당신의 귓가에서 파도치며 출렁일 테니 당신만이 꿈의 주파수로 날 들어주면 돼

 

  베로니카 그러니까 기억해야 해, 꿈속에서도 잊으면 안돼

 

  사랑해, 그래 여기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방송이야

 

'창너머 풍경 > 열정 - 끌리는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미와 장마 사이 / 박진성  (0) 2011.06.11
방편 / 천양희  (0) 2011.05.30
사랑은 산책자 / 이병률  (0) 2011.05.08
박이화를 읽는 고전적인 봄날  (0) 2011.05.05
'나'라는 말 / 심보선  (0) 2011.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