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박이화를 읽는 고전적인 봄날

다연바람숲 2011. 5. 5. 14:28

 

 

 

 

고전적인 봄밤 / 박이화


송도 기생 황진이의 사생활은 만고의 고전인데 신인가수 백모양의 사생활은 왜 통속이고 지랄이야 내가 보긴 황진이는 불륜이고 백모양은 연애인데....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가을밤 황국같은 황진이도 좋고 봄밤의 백합같은 백모양도 좋은데.... 좋기만 한데 왜 이 시대엔 벽계수를 대신해 줄 풍류남아가 없고 지랄이야 명월이 만공산 할 제 달빛 아래 휘영청 안기고픈 사나이가 없고 지랄이야 아, 일도창해 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길 어이타 이 몸과 더불어 유장하게 한 번 뒤척여 볼 박연폭포 같은 사내가 없고 지랄이야

봄밤은 고전인데
이화에 월백하는 봄밤은
만고강산의 고전인데

 

 

오래 전 산벚나무 / 박이화



이른 봄날도 늦은 봄날도 아닌 계절에
늙지도 젊지도 않은 여자
이미 반백의 사내와 봄 산에 듭니다.
그 사내 홍안의 복사꽃도 잠시 말로만 탐할 뿐
하 많은 봄꽃 다 제쳐두고
백발보다 더 부시게 하얀 산벚 아래
술잔을 기울입니다.
어쩌면 전생의 어느 한때
그의 본처였기라도 한 듯
그 사내, 늙고 병들어 돌아온 남자처럼
갈수록 할말을 잃고
그럴수록 철없는 그 여자
새보다 더 소리 높여 지저귑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적막한 산중,
드문드문 천천히 백발의 꽃잎 푸스스 빠져
그 사내 머리 위로 쌓이고,
이윽고 그 여자 빈 술병처럼 심심히 잠든 동안
사내만 홀로 하얗게 늙어 갑니다.
비로소 저 산벚
참 고요히 아름답습니다.

 

 

색, 계 / 박이화



뜨락의 화초가
자신의 꽃보다 서너 배나 더 크고 붉은 헛꽃을 피워놓고
태연자약, 온갖 벌 나비를 유인하고 있다
사월초파일
그것도 해원정사 대웅전 앞에서 버젓이

들은 바에 의하면
딱정벌레 성기 모양의 꽃을 피워놓고
짝짓기 하러 찾아 온 놈들과
희희낙락 제 볼일 다 보는
그런 얌체 蘭도 있다지만

어쨌든 건드리기만 하면
제 볼일 다 볼 때까지
발목 잡고 절대 놓아줄 것 같지 않은
집요한 꽃들의 세계에서

간혹
커다란 호박꽃에 파묻혀
온몸이 꿀이고 꽃가루인 뒤웅벌
그 환한 등 뒤로
꽃잎 통째 닫히는 줄 모른 채

바로!
사랑의 극치에 빠져
죽음마저 미치도록 달콤한 한때라면
사람이 꽃이고
내 몸이 절정인 순간이다


 

 

도화림/ 박이화

 

 

어떤 나무는 온갖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살아도 일생 고요하고 잠잠한데
어떤 나무는 새 한마리 들락이지 않는 날에도 온종일 화사하게 들떠있다
또 어떤 나무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내가 나무보다 더 깊은 그늘이 되는데
어떤 나무는 아예 그곳을 멀찍이 피해 돌아서 가도 내 몸이 먼저 알고 흐드러진다

가령 복사꽃 나무 근처를 지나면 누군가 나를 끈끈히 훑어보고 있다는 느낌, 바람의 손을 빌려 온 몸을 구석구석 더듬어 보고

있다는 느낌, 이윽고 죽은 듯 휘늘어진 가지하나 배암처럼 구불텅! 나를 휘감아오는 느낌 …… 그리하여 나 잠시 현기증에 아찔

할 때 복사꽃 그 미친, 색에 주린 꽃잎들! 일시에 내 피를 흡혈해 버릴 듯한,

그 황홀한 저주받을 사랑으로
우리, 한 천년쯤 한 구덩이에 쳐박혀 잠든다 해도
다시 봄날이면 저 나무 치잉칭 독 오른 그리움으로 눈 뜰
천년 묵은 비단 허물 벗듯 훌, 훌, 훌 아름답게 꽃 필

 

 

 

별미의 봄날 / 박이화

당신은 그날 제가 서지월 시인의 생가 오래된 한옥에서 소문난 우리밀 칼국수를 먹은 줄 아시겠지만 천만에요! 그날 제가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점심으로 먹은 것은 빛깔 고운 살구꽃을 고명한 군침 도는 봄날이었어요 진종일 마당으로 꿀벌들 잉잉대며 진국으로 우려지던 그야말로 봄볕 맛이 끝내주던 그런 봄날 오후였어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면발 같은 하루해가 누구의 구미에도 딱! 들어맞는 그런 봄날 오후 세 시였어요 그렇게 봄 외출은 누구에게나 별식이기도 해서 이하석 장옥관 시인도 버얼써 드시고 가셨다는 그 구릿빛 정남향의 따사로운 곁방에서, 그날따라 봄바람이 공손하게 드밀어 준 꽃향기를 깔고 앉아 그래요, 그날 제가 긴긴 겨울의 공복 끝에 다시 찾은 입맛으로 게걸스럽게 먹은 것은 바로! 시골집 닭똥 냄새 시큼한 김치처럼 풍풍 풍기는 그런 별미의 봄날 오후 세 시 삼십 분이었어요

 

 

후박나무 아래 잠들다 / 박 이화

봄날이 와서
억세게 운수 좋은 어느 날
내게로 어떤 봄날이 와서
이 세상 모든 죽음마저 꽃피워 줄 때
나 저 후박나무 아래 들겠네
그럴 때 통영군 연화리 우도의
저녁하늘 바라보던 내 눈은
후박나무 어린 잎에게 주겠네

내 잠든 동안
저 푸른 후박나무 나를 대신할 수 있도록....
아, 살면서 누구보다 고온다습했던 내 생은
누구보다 먼저 후박나무 아래 썩겠네

그렇게 한 생쯤
내 몸도 꽃잎 아래 물컹,
향기롭게 썩었으면 좋겠네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그대는 영영
아주 내게서 잊혔으면 좋겠네

다시 봄날이 와서
억세게 운수 좋은 어느날
내게로 어떤 봄날이 와서
나를 저 후박나무 심장처럼 높이
꽃피워 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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