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나'라는 말 / 심보선

다연바람숲 2011. 5. 4. 21:18

 

 

 

 

 

 

'나'라는 말 / 심보선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 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 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 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

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 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 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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