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장미와 장마 사이 / 박진성

다연바람숲 2011. 6. 11. 21:01

 

 

 

 

장미와 장마 사이 / 박진성

 

 

 

장미가 시들면서 기온이 올라가고
습도가 높아졌다 추악하게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장미가
저기압의 구름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28번을 타보면 안다 우이동에서부터
강남 일대까지 장미 軍團이 서울을 점령했다
오월의 겨드랑이나 허벅지 같은 곳 이를테면
홍릉 수목원 버드나무 아래에서 연인들은 키스를 해댔다
이파리에서 가시로 점프하는 벌레, 어머니는
김치를 가방에 담아서 올라왔다 등이 굽은 노인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아이들은 철수 바보, 영순이 병신
이런 글자들을 벽에 陰刻했다 어떤 절실함도 없이
애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새벽
측백나무 뾰족한 가시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장미, 장미, 장미의 계절, 공중에서 부유하는
날벌레 떼가 가로등에 모이기 시작했다
반지하 창문 아래에 누워서 빗소리를 들어도
뿌리까지 젖지는 못했다 나무의 뿌리 깊이에서
다운받은 음악 파일을 밀어 올려도
옆집 여자는 카드 빚을 진 아들과 자꾸만 싸웠다
장마가 올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습기가 파고들겠지 어서 오시라
모든 것이 부패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집
방부제처럼 나는 혼자서 싱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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