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순수 - 비우는말

나는 간다 / 이병률

다연바람숲 2010. 11. 22. 20:30

 

 

 

 

 

 

 

 

 

거대한 어항 같은 도시 안에서 물기 없는 호흡을 하고 있을 때,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와 떠들고 있을 때, 문득 나를 에워싸고 있는 많은 것들을 놓고 싶을 때, 깊은 밤 잠에서 깨어 통장 잔액 확인을 하고 있을 때, 죽집에 들어가 죽 한 그릇 시켜놓고 기다리다 주인이 가져다준 신문 첫 장을 외면하고 싶을 때, 허파로 숨을 쉬어야 하는 고래가 아플 적에 친구 고래가 아픈 고래를 수면까지 밀어올려서 숨을 쉬게 해준다는 애길 들었을 때, 웅크린 채로 먼 길 가는 달팽이의 축축한 행로를 지켜보고 있을 때, 아무도 없는 밤바다에 알몸을 담그고 누워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을 때, 어쩌면 이 세상은 남자와 여자 뿐일지도 모른다는 억지스러운 논리와 세상 모든 이야기가 남자와 여자에 관한 이야기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해야 할 때,

 

기다리는 것이 희망인 줄 정확히 알면서도 희망이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버리는 군중들 속에서도, 한낮인데도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찾아왔을 때, 그렇게 한낮이 무거웠을 때, 달큼한 바람이 불고 몸이 뜨거워지고 그래서 눈을 감고 싶을 때, 뭔가 가득 채워놓은 것이 쓰러져 엎어졌을 때, 이사 후, 아무렇게나 기대놓은 그림을 누군가가 말을 해줘서야 바로잡고 있을 때, 정이 들어버려서 마음이 통해버려서 달빛 아래 각자 다른 길로 헤어지고 싶지 않을 때, 뭔가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 짐을 꾸리고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그렇게 그렇게 한없이 한없이 걸아나갔다가 다시는 몸을 돌이키고 싶지 않을 때, 문득 뚜렷한 이유도 대상도 없이 무작정 고마울 때, 보름달 주기를 따라 피었다 졌다를 반복하던 마당의 꽃들이 어느 순간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고 말할 때, 다시 또 누군가를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을 때.

 

 

이병률 산문집 <끌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