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순수 - 비우는말

보라... 신비를 녹인, 사랑에 미쳐보지 않은 이는 볼 수 없는 / 이병률

다연바람숲 2010. 11. 8. 00:16

 

 

 

 

새로 출시된 냉장고를 어떻게 팔아야 하는가 . K가 요즘 고심하는 문제이다 . 냉장고도 그냥 냉장고가 아니라 보라색 냉장고다 . K는 광고 시안 마감일을 앞두고 책상 위에 보라색과 관련된 단어들을 적어놓았다 . 아는 걸 다 적어놓았지만 흡족하지 않은 그는 사무실을 빠져나와 밤길을 걷기로 한다 . 밤길을 걷다 자루 속에 갇힌 나를 구제해줄 뭔가를 만날 수 있을까 .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오면서 K는 생각한다 .
밤길 , 추운 천막 사이로 홍합이 끓고 있다 . 냄새만으로도 K는 그것이 홍합 끓는 냄새인 줄 안다 . 몸을 웅크리고 걷던 사람들은 천막 안으로 들어가 술을 달라 할 것이다 . 그리고 시키지도 않은 홍합 국물에 숟가락을 꽂아 속을 데우려 할 것이다 . 번거로운 일들을 내려놓을 것이다 . 홍합 딱지를 열면 저 안쪽 딱지 벽면에서 보라색이 흘러나오겠지 . 다 먹은 홍합 껍질처럼 버리기 아까운 색깔 , 그렇다고 취 (取 )하자니 어려울 것 같은 도저함이 배어 있는 색 . 보라색 .

보라색은 발칙하기도 해서 뻗은 손을 그냥 되돌아오게 만든다는 것쯤을 알고 있다 . 보라색은 관능적이어서 심장을 반응하게 하며 , 또 보라색은 질투 앞에서 차마 체면 때문에 미치지 못해 팽팽함으로 부풀어진 감정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도 .
강한 빛보다는 낮은 조도에서 빛을 발하는 색 . 너무 밝은 조명이라면 보라색은 쉽게 묻히고 말 것이다 . 어두운 실내 조명에 냉장고를 세워둘까 ? K는 이른 새벽이나 해지는 저녁 , 가끔 보랏빛 속에 갇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 중국 핑야오 [平遙 ]에서의 잠을 뒤척였던 새벽과 서해 어느 바닷가에서의 저물 무렵 . K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절실하게 느끼게 해 주었던 그 새벽 그 저녁 , 대기에 떠돌던 보라색은 온통 누군가와 함께할 수 없어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었던 , 간절한 상태로 데리고 갔다 .
강한 빛보다는 낮은 조도에서 빛을 발하는 색 . 너무 밝은 조명이라면 보라색은 쉽게 묻히고 말 것이다 . 어두운 실내 조명에 냉장고를 세워둘까 ? K는 이른 새벽이나 해지는 저녁 , 가끔 보랏빛 속에 갇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 중국 핑야오 [平遙 ]에서의 잠을 뒤척였던 새벽과 서해 어느 바닷가에서의 저물 무렵 . K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절실하게 느끼게 해 주었던 그 새벽 그 저녁 , 대기에 떠돌던 보라색은 온통 누군가와 함께할 수 없어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었던 , 간절한 상태로 데리고 갔다 .
그 늦은 시간 K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 로모 카메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번개로 모여 늦게까지 함께 있다고 했다 . 그런 연락은 받지 않아도 좋은데 . 그들은 어느 지하에 막 들어와 K 생각이 났다며 전보를 알려온 것이다 . K는 집으로 갈 것도 그렇다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갈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곳으로 향하는 택시를 탔다 .
K 도 알고 있는 그곳은 몽환을 이해하기에 적당한 장소이다 . 그곳의 이름은 ‘마음’이며 , 홍대 근처 대로변에 있는 지하 카페 . 새벽 두 시가 다 되어
만난 사람들은 카페의 몽환적인 구조와 장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포도주를 마셨고 K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 사람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 아무도 K의 행동에 뭐라 말하는 사람이 없어 눈 감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 한 모금 포도주를 마시고 누웠는데 사방에 걸린 보라색 망사천들이 K를 덮어주는 것 같았다 . K는 생각보다 깊이 , 그리고 오래 잠들었던 것 같다 . 한 사람의 다리가 저리든 말든 K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보라색에 취해 새벽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
눈을 붙여서인지 K는 잠들 시간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 이소라의 음반을 찾아 걸고 창문을 열었다 . 이소라의 음악은 철저하게 보랏빛이다 . 저 눈 내리는 바깥 , 보라색 드레스를 걸친 그녀 앞에 불어오는 눈바람도 보랏빛인 것만 같다 . 그녀는 이기적이며 이중적인 세계를 향해 이렇게 읊조리는 것만 같다 .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차라리 잘 됐어 - 내가 다 들어줄게 - 어디 끝까지 한번 해봐 - 난 그러고도 널 사랑할 수 있으니 , 라고 .
열여섯 , 열일곱 나이의 소년들을 냉장고 속에 잔뜩 처넣을까 ? 보라색 냉장고 문이 열리고 안에서 와글와글 소리가 쏟아져 나오면 여자는 사내 아이 하나를 고르고 , 잠시 후 와인 테이블이 세팅되는 건 어떨까 ? 그건 가스가 많이 든 음료 광고나 샴페인 광고 같겠지 . 시대의 요구에 따라 잠깐 유행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색 , 보라를 닮았다 , 소년들은 . 소년들의 찬란한 봄날은 시대도 받아주지 않을 뿐더러 그들 자신들에게도 쉽게 사라져 잊혀지고 마는 것이 된다 . 슬픈 것이 된다 . K는 이번 광고를 성공적으로 마쳐 광고주로부터 보라색 냉장고를 선물받게 된다면 어디에 세워둘까를 생각한다 . 보라색 슬픈 냉장고를 .
아침 여섯 시 . 눈은 그쳤다 . K는 메일함을 연다 . 아까 헤어진 무리 가운데 T가 보낸 메일 하나가 도착해 있다 . 택시를 기다리면서 나에게 “잘 잤어요 ?”라고 묻는 T에게 “아니 , 안 잤어 . 보라색 냉장고 광고 콘셉트를 고민 중이었어”라고 대답했는데 친절하게도 T는 돌아가서 K에게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
1856 년 영국의 어느 실험실에서 보라색의 개념은 재탄생한다 . 자연에서 봤던 보라색이 아닌 인위적으로 염색 가능한 색이 탄생한 것이다 . 당시 조수였던 열아홉 살의 윌리엄 헨리 퍼킨스 (William Henry Perkins)가 탄소를 잘못 증류하는 바람에 얻은 색소가 바로 보라였다 . 퍼킨스는 보라색 꽃 모브 (mauve)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퍼킨스의 모브 (Perkins mauve)’라는 이름으로 이 색소에 특허를 내기도 했으나 염색공들은 아무도 이 색소를 사용하지 않았다 .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 보랏빛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뜻 보라색 천을 몸에 걸치기는 역시나 두려웠을 것이다 . 당시로선 쉽게 다가갈 수 없었던 , 신비를 녹인 색을 갖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



보라는 자연 속에서 제일 드물게 눈에 띄는 색이었으므로 일상스럽지 않다는 면에서 더 선뜻 몸에 걸치기가 꺼려졌을 것이다 . 하지만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지난 후 프랑스에서 대선풍을 일으키게 되면서 수많은 옷과 식기들은 보라색 염료에 정복당하게 된다 .
메일을 읽고 난 K는 보라색을 처음 대면했을 최초의 한 인간에 대해 상상한다 . 어땠을까 ? 떨렸을까 ? 무서웠을까 ? 난데없이 따뜻하다고 느꼈을까 ? 혹은 미친 듯이 울었던 건 아닐까 ?
하지만 알 길은 없다 . 한 달 뒤 출시를 앞두고 있는 냉장고의 몸에 발라지기 위해 많은 양의 보라색 페인트가 소비될 거란 사실만 상상할 수 있을 뿐 . 근데 이 난데없는 두근거림은 무엇일까 ? T의 세심한 배려에 대한 두근거림일까 ? 아니면 혼자 새벽을 맞은 독신자의 흔하디 흔한 몸의 신호 같은 것일까 ? 심장박동 소리와 냉장고 가동하는 소리를 연관 지어 이미지를 표현해볼까 ?
몇 시간만이라도 자겠다고 누운 침대 위에서도 K의 두근거림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
혹시 심장을 꺼내볼 수 있다면 우리들 심장은 보라색이 아닐까 ? 그래서 우리들 가슴 안쪽에 든 멍은 오래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건 아닐까 ?
문득 K는 사랑에 미쳐보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보라색을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만약 누구든 그 찬란했던 기억을 보관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고체이든 액체이든 혹은 기체일지라도 그것은 보랏빛일 거란 생각을 했다 .


이병률

충북 제천 출생.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여행사진 산문집 <끌림>을 펴냈다. 어딘가로 떠나 있거나 아니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