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순수 - 비우는말

분홍...베이면 안 될 것 같은 너, 그래서 꽃이 되었니? / 이병률

다연바람숲 2010. 11. 7. 16:39

 
 

 

 


 

애초 분홍은 잘못 태어난 색이다. 색이 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공기가 되려는 것을 한사코 잡아놓은 것이다. 색이 되려고 했는데 빛을 너무 많이 쬐었다. 되다 말려고 했는데 바람이 닥치는 바람에 굳어버렸다. 색깔의 사생아. 그래서 지루한 세상은 조금 나아졌던가. 안 좋은 기분이 나아졌는가. 아픈 머리에 머플러를 두르고 봄이면 꼭 발광하는 분홍.


욕망의 놀이를 하고 싶었다. 이 색과 저 색 사이를 뛰어다니며 이 색과 저 색의 질투라도 불러내고 싶었다. 싸움이 있는 곳에 언제나 그가 있었다. 나와 당신의 싸움, 당신과 나의 싸움, 그 자리에도 분홍은 있었다. 그러니까 욕망의 놀이의 주체였다. 하지만 혼자 놀아야 할 색이 아니던가, 분홍은. 그래서 분홍은 꽃이 되었다.
분홍을 끼얹고 그 자리에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곁을 주다’라는 말. 분홍은 그 말의 사용법을 안다. ‘혹시 날 위해 웃어줄 수 있어요?’라고 묻는 사람에게 헤프게 웃어줄 줄도 안다.
은근 닮았다. 초여름 저녁의 노을. 높은 곳에 올려두었을 때의 심장의 빛깔. 그리고 자신이 무엇임을 안다. 불륜의 감정. 조악한 경지에 들었음을 선언했으므로 무엇이든 저지를 수 있다.
분홍은 말한다.
“꼭 집에 있어요. 나를 배달시킬 겁니다. 받는 즉시 개봉하세요. 오래 두면 위험합니다. 대신 부끄러움이 많으니 혼자 있을 때만 개봉하세요.”
그렇게 분홍은 배달된다.





조금 가난한 색. 그래서 그 위에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싶은 색. 조금 모자란 색. 그래서 많이 배울 수 있는 색. 넘어진 일이 자꾸 머리에 남아서 귓가가 화끈해지듯. 실수한 일들이 그 다음 날 더 선명해지듯. 자꾸 마음에 남는 색.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가슴에 더 오래 남는다. 지워도 닦아도 더 선명해져서 창피하단 생각마저 드니까.
마음에 따라 두꺼울 수도, 얇을 수도 있는 색이다. 투명해 보일 수도 탁해 보일 수도 있는 색이다. 기분에 따라 그림이 많게 보일 수도, 글씨가 많게 보일 수도 있는 책과 같은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일은 보이지 않고, 내가 필요로 하는 색만 보인다. 우리가 분홍색을 알아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걸 원하고 있기 때문에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눈에 들어와 향기가 되고 기운이 된다. 누구나 살고 있지만 누구나 살아 있다고 느끼기 어려운 것처럼.
잃어버린 것이 많으면서도 잊은 것들이 많으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괜찮은 척을 하며 살아가지지 않던가.


가끔씩 우리가 잊어버리고 사는 것들. 지난 초겨울 세탁소에 맡겼는데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던 옷이나 언제 기회가 되면 써야지 하면서 서랍에 넣어두었던 할인쿠폰 같은 것들.
물론 고의로, 의도적으로 잊어버렸던 것들도 있다. 도장을 파달라고 시켜놓고는 막상 도장 쓸 일을 지나쳐서 그냥 안 찾으러 가거나 진작 서점에다 책 주문해 놓고는 선금을 걸어놓은 것도 아니니 에이, 그냥 없던 걸로 하자며 접어버리는 경우. 오래 전부터 기다려왔던 만나자고 한 약속에 아예 나가고 싶지 않을 때나 좋아한다고 말하고 뒤돌아서는 순간부터 좋아지지 않아서 연락을 끊어버렸던.
그런데 정말 아까운 것들. 너무 오래되어 기한마저 지나버려서 다시 회복할 수 없을 때의 기분이란, 또 얼마나 허전한가. 아침에 세수를 하거나,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빗거나 하면서 갑자기 그런 후회들이 떠오르게 되면, 하루 종일 찜찜하게 머리 속을 따라다니는 그 생각.
지금 찾으러 가면 그 세탁소에 내 옷이 있을까? 도장 쓸 일이 급하게 생겼는데, 지금 찾으러 가면 뭐라고 안 할까. 지랄이다.
그건 분홍이 시킨 일들이다. 말썽쟁이 분홍이 일으키는 연기의 짓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뭐든 가지려고 하는 마음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살이다. 안달의 색이며 당신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상태와 당신 자체를 송두리째 질투하는 마음의 자화상. 그러니 참 고약하다.
심장으로도 가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당신에게 일생 동안, 단 한 순간만이라도 되고 싶더라도 문이, 마음이 열리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심장으로 가 닿지 못하는 일들은 심장이 종아리까지 타고 내려가 분홍으로 퉁퉁 붓게 한다.





심정의 기복을 담은 색. 그래서 먹고 싶거나 몸에 걸치고 싶은 색. 마음에 닿으면 길길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색. 분홍은 그런 색이다.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 없이 느껴지는 날, 가까이 두어야 할.
그러나 꽃에 눈을 가까이, 오래 두면 안 된다. 분홍에 마음을 베이면 안 된다. 차라리 꽃그늘 쪽이 좋겠다. 꽃그늘 아래선 아픈 것도 나을 테니.





글ㆍ이병률
충북 제천 출생.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여행 산문집 『끌림』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