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유화부인 / 김혜순

다연바람숲 2005. 12. 21. 18:27

 

 

 

                          유화부인

 

 

김혜순



나는 늘 한 여자를 구해주는 상상을 한다
그 여자의 손을 잡고
그 여자를 품에 안는 상상을 한다
나는 늙어도, 늙지도 않는 여자
언제나 같은 여자
꿈속으로 들어가면 늘 나를 기다리던 그 여자

서치라이트처럼 쏟아지는 햇빛에 쫓겨다니다
그 빛에 강간당해 날개가 다 타버린 여자
나는 죽은 얼굴에 밤마다 미백 크림을 발라준다
아기를 가졌다고 아버지에게 잡아 뜯겨
한정없이 입술이 풀어진 여자
바위에 눌려 깊은 물속에 처박힌
물새같이 가련한 여자
나는 그녀의 끝없이 풀어지는 강물의 입술로 시를 쓴다
급기야는 도망가다 감옥에 갇혀 알을 낳은 여자
(아버지는 그녀의 아기를 돼지에게 주었다지만)
나는 그녀가 낳은 알뿌리를 옮겨 심고
거기에 꽃처럼 맺혀 서 있다
나는 늘 한 여자를 구해주는 상상을 한다
나는 그 여자의 손을 잡은 것처럼 내 손을 잡기도 하고
나는 그 여자를 숨긴 것처럼 내 얼굴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언제나 같은 여자 늙지도 않는 여자
이야기 속으로 가라앉기만 하던 여자
아직도 내 몸 밖으로 한번도 나와보지 못한 그 여자
나는 그 여자의 몸에 베이비오일을 발라준다

그녀의 내지르지 못한 비명이 엎어진건가 붉은 하늘이 지자
그녀의 손톱이 후벼 파놓은 상처인가
한밤중 쓰라린 초승달이 뜬다
나는 또 한 여자를 구해주는 상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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