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여인숙 /
김선우
여행 마지막날 나는 무료하게 누워 흰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된 여관이 으레 그렇듯 사랑해,
내일 떠나 따위의 낙서가 눈에 띄었다 벽과 벽이 끝나고 만나는 모서리에 빛바랜 자줏빛 얼룩, 기묘한 흥분을 느끼며 얼룩을
바라보았다
두 세계의 끝이며 시작인, 모서리를 통해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다래순 냄새가 났다 다른 세상의 대기에
접촉한 순간 놀라며 내뿜는 초록빛 순의 향기, 머리를 받쳐준 그녀는 오래도록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의 눈 속에서 나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녀의 겨드랑이에 얼굴을 묻으며 내가 말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에게선 온갖 냄새가 뿜어나왔다
포마이카 옷장의 서랍 냄새, 죽은 방울새에게서 맡았던 찔레꽃 향기, 볼에 덴 것처럼 이마가 뜨거웠다 여름 소나기의 먼지 냄새, 엄마의 속곳
냄새......세포 하나하나에 심장이 들어선 것처럼 나는 떨었다
들어왔지만 들어온 게 아닌, 마주보고 있지만 비껴가는
슬픈 체위를 버려......탄성을 가장하지 않아도 되는 잘 마른 밀짚 냄새,허물어진 흙담 냄새, 할머니 수의에서 나던 싸리꽃 향기, 오월의
가두에 흩어지던 침수향을 풍기며 그녀가 뼛속까지 스며들어왔다
모든 시공이 얽혀 있는, 단 하나의 모서리로 그녀가
돌아간뒤, 자궁에서 빠져나올 때 맡았던 바닷물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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