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감성 - 통하는문

죽음에의 초대 / 케테 콜비츠

다연바람숲 2005. 11. 28. 13:20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버렸다. …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 케테 콜비츠

 

 일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는 1867년에 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공부하던 오빠를 따라 그 곳에서 미술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일생은 조부모이래 자유주의 전통의 가정분위기 속에 자유와 정의를 갈망했을 뿐만 아니라. 시달리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그들과 함께 연대하는 길을 찾았다. 그러나 케테 콜비츠가 추구했던 목표는 사회고발이나 선동에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사태의 위급성'내지는 '긴급성'을 표현함으로써 '가난의 추방'이나 '질병의 퇴치'의 필연성, 사회개혁의 불가피성을 일깨우려는 데에 있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생명에 대한 경외를 불러일으키면서, 소외되고 학대받는 민중과 더불어 함께 하는 새로운 인간 공동체 형성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주제는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은 자신이든 주위의 상황이든 항상 죽음의 공포 - 사실 일상이었으므로 공포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 속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녀의 아들 페터를 잃는가 하면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손자 페터를 죽음의 사신에게 넘겨주고 만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서 독일은 1천3백만명이 징집되었고 1백 7십만명이 전사했다. 그야말로 유럽에서는 한 세대가 전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거침없이 자행된 것이다.

그녀는 질병과 가난뿐만 아니라 전쟁을 영원히 몰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반전화의 역사는 콜비츠에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녀는 1922년 전쟁에 관한 연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전사'라는 비보에 접한 가족들의 슬픔과 한을 '부모', '희생', '어머니들'등의 작품에서 잘 표현해내고 있다.

 콜비츠는 1934-1935년간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가 없었다. 백여 점이나 되는 그녀의 자화상들 중에서도 이 기간에 만들어진 '죽음에의 초대'는 그녀의 말기 작품가운데 유명하다. 아들을 전쟁에 잃은 후의 그녀의 작품들은 모델을 이용하기보다는 많은 드로잉을 통해서 단순하고 강렬한 선들을 구축했다. 그녀의 아들은 전쟁에 참가해 전사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방식으로 인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너희들 그리고 너희 자녀들과 작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게 줄곧 행운을 가져다주었던 내 인생에 성호를 긋는다. 나는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 이제는 내가 떠나게 내버려두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을 멈추고, 망각한다면 우리는 또 언젠가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란 말을 듣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