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순수 - 비우는말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中

다연바람숲 2005. 11. 21. 17:48

 

 

"우리가 사는 마을 이름이 나비라는 거 알아요"

"처음 마을로 올때 언뜻 들었어요."

"옛날엔 그 언덕 위에 열채도 넘는 집이 있었어요. 팔십오 년쯤 전에 산사태가나 마을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그 마을 이름이 나비였어요. 나비가 아주 많답니다. 지금도 그 일대는 나비와 나방 특별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죠. 실은 우리집 위로 계속 올라가면 산 속에 생물학과 교수의 작은 작업실이 하나 있어요."

"그분은 언제 오죠"

"글쎄요. 아무 때나 불쑥불쑥 오니까. 왜요."

"나비에 관해 나도 좀 알고 싶어요."

"이를테면 무엇을?"

"아무거나요. 나비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나비는 삼천만 년 전에 나방에서 나비로 진화했어요. 나방은 십억년 전부터 있었고.

나비와 나방의 종류는 십만 종쯤 될겁니다. 나비는 알아서 육 일만에 나오는데 흔히 애벌레를 풀쐐기라고도 하죠. 애벌레인 나비는 미친 듯이 풀잎을 먹어치웁니다. 네번 허물을 벗는 동안 엄청난 애너지로 엄청난 양의 잎사귀를 먹죠. 탐육스럽게 느껴질 정도지만 알고보면 징그러운 벌레로부터 눈부신 나비로 거듭나기 위한 숭고하고 끔찍한 노역입니다. 그 풀은 비단 실이 되어 몸에서 풀려나오는데 고치를 만들기 위해 뽑아내는 실이 사십킬로미터나 된답니다.

 

나비는 자기 몸에서 나온 비단으로 자신을 가두고 그 속에 들어앉지요. 겨울에 나무가지에 오그라진 나뭇잎처럼 달려 있는 것이 나비의 고치죠. 수개월 동안 밀폐되어 있다가 드디어 나비로 변신하게 되는데 나비가 되고나면 이제 풀잎을 먹지 않습니다. 입도 없어서 나비가 된 후로는 전혀 먹지 않는 나비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비들은 굉장히 힘이 세죠. 모나코 나비는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요. 멕시코 계곡에서 겨울을 난 뒤에 유럽까지 날아가니까요. 그러니까 삼천이백 킬로미터를 나는거죠"

 

빠르게 말을 쏟아낸 그의 눈 속엔 장난스러운 웃음이 가득 차 올랐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됐어요?"

"기억력이 굉장하군요."

"경우에 따라 달라요. 기억도 선택해서 한다잖아요." 이번에는 내 눈 속에도 웃음이 차올랐다.

"실은 그 생물과 교수한테서 들은 이야깁니다."

"그렇군요."

"나비가 비상하는 것도 신기해요. 날개가 있다고 해서 언제 어느 때나 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이카루스에게 태양이 너무 다가가지 말라는 치명적인 주위사항이 있었던 것처럼 나비에게도 지켜야할 사항이 있어요. 우선 나비가 날기위해서는 몸이 뜨거워야 됩니다. 삼십도 이상의 체온을 유지해야 하죠. 나비의 배쪽엔 비늘가루가 변한 털이 빼곡이 덮여 있는데 그곳에 최대한 햇빛을 쪼여

그 복사열로 체온을 올립답니다. 그래서 날씨가 맑은 날만 날고 흐린날이나 비오는 날은 비상하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체온을 높일 수 없으니까요."

"그랬군요. 그런데 그 몸으로 바다를 건너가다니... 비장하네요."

 

나는 몹시 슬픈이야기를 들은 기분이 되었다. 나비가 불속으로 날아드는 것도 체온에 대한 욕망,

바로 비상에 대한 욕망 때문일까....

 

"이제 생물학과 교수를 만날 일은 없는 거죠."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자가 미남이라 불안해서 말입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도 상당한 미남 축이었다.

"나비를 좋아하세요?"

"아뇨. 아까 말한 대로 너무 비장해서 싫습니다."

"하지만 삶에대한 우리의 본능 자체가 비장한 것인걸요."

"난 그런 비장한 본능 없어요. 쉬운게 좋아요.

 

전경린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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