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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추문이 성공의 계기가 된 예술가…때로 끔찍한 위기는 드라마틱한 기회

다연바람숲 2017. 9. 26. 14:25

 

 ‘성 히에로니무스’, 목판, 75×103㎝, 1480년경, 바티칸미술관,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빈치는 동성애 추문으로 메디치가에 거절당한 자신의 굴욕과 비애감을 몸부림치는

  성 히에로니무스에 투영, 예술로 승화했다.

 

 

추문은 예술가들의 작업과 인생에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상처받고 좌절하는 것으로 끝났을까? 아니면 그것을 발판으로 마음속 칼을 예술적 혹은 철학적으로 승화시켰을까? 후자의 경우 역사에 오래도록 남았음은 물론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추문의 중심에 서 있었다. 1476년 24세의 다빈치는 남색죄로 고소당해 법정에 출두해야만 했다. 고소는 익명으로 행해졌다.
당시 피렌체에는 훌륭한 시민들이 위험 없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진실의 입(Buchi della Verita)’이라는 별명이 붙은 ‘북’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통해 사기꾼이나 음모자, 살인자나 단순히 간통을 했다고 믿어지는 이웃을 아주 편리하게 밀고했다.

당시 다빈치는 스승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집에 살았는데, 다른 청년 세 명과 함께 고소돼 남색죄로 넘겨졌다. 이들 가운데 가장 어린 열일곱 살가량의 야코포 살타렐리라는 청년이 몸장사에 깊이 빠져들자 정숙한 이웃이 분개해 밀고한 것일 수도 있고, 사랑의 경쟁 관계에서 기인한 계략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남색 행위는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법률상 화형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피렌체에서는 지식인 사이에 동성애가 만연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 페도필리아(아동성애)가 도시국가를 이끌어갈 역량 있는 인재를 발굴하려는 스폰서십으로서의 의미를 지녔음을 감안한다면, 고대 그리스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 시대에 상류사회에서의 동성애도 아주 자연스러웠을 터. 레오나르도가 죽은 지 40년쯤 지나면 적어도 지식인 계층에서 동성애는 그리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다빈치가 가장 부끄럽게 여기며 자신의 가장 큰 죄로 생각한 것은, 무엇보다 세인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렸다는 점과 소소한 사건으로 민망하게 대중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점이었다. 소문이 더 무성해진 것은 이 사건에 메디치 가문의 남자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메디치가의 수장이었던 로렌초 메디치는 연줄을 이용해 자기 일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다.

다빈치는 로렌초 메디치의 덕을 톡톡히 봤지만, 바로 몇 년 뒤에는 그 때문에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1481년 로렌초가 바티칸의 시스틴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한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다빈치만 쏙 빼놓은 것. 당시 선정된 예술가는 보티첼리, 시뇨렐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로 거의 대부분 베로키오 공방 출신 작가들이었다. 스승인 베로키오의 수제자로 어린 시절 이미 크게 인정받았던 다빈치의 자존심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작품이 ‘성 히에로니무스’다. 성 히에로니무스(342~420년)는 최초의 라틴어 성경 번역자다.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내면적 투쟁을 벌여 자신의 약점을 극복한 인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한 사자의 발톱에 박힌 가시를 뽑아줘 사자의 우정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다빈치는 나이를 알아볼 수 없고 퀭하게 눈이 패인, 비쩍 마른 성 히에로니무스가 돌로 가슴을 치는 모습을 그린다. 벌어진 입은 신에게 자비를 애원하고 있고, 사자의 포효가 이 기도에 가세하는 모양새다. 메디치 가문에게 거절당한 자신의 굴욕감과 비애감을 성 히에로니무스의 몸부림을 통해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쨌거나 추문이 다빈치를 더욱 훌륭한 예술가로 만들어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완성은 나쁜 것인가? 사실 많은 예술가는 완벽과 완전을 추구하는 성향이 많기 때문에 전시 혹은 설치되기 전까지는 모두 미완성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있다. 다빈치의 미완성은? 그것은 천재의 딜레마기도 했다.

그는 메디치가의 거부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복수를 가하기에 천재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하고 너무 흥미로운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다. 이미 머릿속에는 훌륭한 완성작이 존재하니 작품의 끝마무리는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다. 세속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는 뒷심이 부족한 것이겠지만, 다빈치는 비상하며 충천하는 아이디어를 따라잡는 일만으로도 인생이 무진장 흥미롭고 지나치게 분주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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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620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아르테미시아는 타시에게 이용당했다는 자신의 모욕감을 복수하는 홀로페르네스 얼굴에 생생하게 표현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위대한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역시 추문이 오히려 예술가로서의 성공에 큰 도움을 준 드문 사례다.

한국판 논개 이야기라고 알려진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미술사의 섬뜩한 그림으로 정평이 나 있다. 구약성서 외경에 유디트라는 지조 있는 유대인 여성이 앗시리아 적장인 홀로페르네스를 술에 취하게 한 다음 목을 베어 자신의 백성을 구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아르테미시아는 사랑했던 한 남자에 대한 복수의 심정을 이 그림을 통해 극적으로 토로했다.

당시 여성 화가는 아버지가 화가였을 경우에만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이였다. 당대 꽤 명성을 날리던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딸의 천부적인 그림 재능을 알아본다. 문제는 18세 딸의 미술 교육을 동업자이자 유명한 풍경화가며 친구였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맡긴 일. 거친 호색가였던 타시에게 딸을 맡긴 행위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돼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테미시아는 타시에게 강간을 당했다. 사실 시초는 강간이었을지언정 그 이후는 화간(부부가 아닌 남녀의 육체적 관계)이었다. 그렇지만 둘의 사랑이 결렬되는 순간 그녀는 고소를 했고, 이 스캔들은 로마를 술렁이게 했다. 타시는 체포됐고 약 7개월간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타시는 시종일관 혐의를 부인하며, 아르테미시아가 먼저 유혹했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모욕과 수난을 당했고 끝내는 자포자기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 아르테미시아에게 거액의 결혼 지참금을 노린 로마의 3류 화가 스티아테시가 청혼을 했다. 그녀는 팔려가다시피 결혼식을 올렸다. 로마를 떠나 피렌체 공국으로 도피한 그녀는 은둔하며 작품 제작에만 전념했다.

사건은 종결됐어도 유명 화가의 딸 아르테미시아의 스캔들은 끝 모른 채 피렌체 사교계에 퍼져 나갔다. 추문이 퍼질 대로 퍼진 상황에서 그녀에게 뜻밖의 주문이 들어왔다. 게다가 작품 의뢰자는 당대의 최고 실력자였던 코시모 메디치 2세였다. 그리고 작품 주제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

1615년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코시모 2세는 아르테미시아의 화실에 20여명의 손님을 대동하고 방문했다. 아내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해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 피렌체를 대표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이끌고 화실을 전격 방문한 것. 사실 피렌체 출신 거장들이 워낙 기라성 같았기 때문에 타지 출신 예술가가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파격적인 일이었다. 코시모 2세는 아르테미시아의 숨기고 싶은 과거를 잘 알고 있었지만, 과거를 묻지 않았다. 그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오로지 예술적인 능력이었다.

복수의 마음이 절실하게 담겨져 있어서일까. 작품은 훌륭했다. 코시모 2세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단검으로 자르고 있는 유디트의 얼굴이 바로 아르테미시아의 얼굴임을,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이 그녀를 강간한 타시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챘음에도 이를 얘기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코시모 2세는 대동한 사람들에게 아버지 솜씨보다 뛰어나지 않느냐고 아르테미시아를 치켜세웠다.

아르테미시아는 코지모의 배려로 한 번도 여성 화가에게 개방되지 않았던 피렌체의 미술가 길드 겸 대학에 최초로 가입한 여성 예술가가 됐고, 동시에 한림원에 가입한 최초의 여성 직업화가가 됐다. 이로써 아르테미시아는 강간 사건의 수치스러운 주인공이라는 불명예를 말끔히 씻을 만큼 예술가로서의 영예를 안게 됐다.

치명적 위기일수록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법이다. 때로 끔찍한 위기는 드라마틱한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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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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