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시대가 오기 전 화가들은 주문자의 요구를 충실히 그렸다. 주문자는 대개 왕족과 귀족의 남자들이었다. 그 남자들이 주문한 그림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벌거벗은 여자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현실 속 여자들이 아니라 한결같이 그리스 신화 속 비너스와 같은 여신들이거나 성서 속 밧세바와 수잔나 같은 여성이었다.
남성들이 벗은 몸을 아무런 검열 없이 감상하기 위해선, 신화와 성서라는 베일 혹은 프레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들은 더 이상 나체(naked)가 아닌 누드(nude)로서 자리매김한다. 누드란 세속적으로 벌거벗은 여자들이 아닌, 아름답고 탄탄하게 재구성된 육체를 말한다. 그리고 누드의 대표 격인 비너스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올랭피아, 오달리스크, 마하와 같은 이름으로 이름만 살짝 바뀌어 드러난다.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전형적인 누드의 패러다임을 제공한 최초의 그림은 무엇일까?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1510년)’일 것이다. 그 비너스야말로 남성들의 판타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가장 천상적인 비너스다. 왜? 비너스가 실내인지 야외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장소에서 아주 다소곳이 누워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눈을 감고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흐뭇해한다. 반면 연인이나 아내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사실, 매번 낯설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그녀가 아닌 것 같다. 낮에 눈을 뜨고 온갖 걱정거리를 토해내던 현실적인 여자는 더 이상 거기에 없다. 그때 느끼는 낯선 감정은 미지의 것이다. 그녀가 접근과 소유가 불가능한 대상으로 보이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소유할 수 없는 까닭에 욕망의 충족이 지연되므로) 또 다른 욕망이 불끈 일어나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눈 감은 여자를 그린 그림은 역설적으로 지배층 남성 관객에게 훨씬 더 용이하게 욕망의 대상으로 보였을 것이고, 만만하게 장악할 수 있다는 느낌을 줬을지도 모른다.
ㅁ비너스의 탄생’, 1863년, 캔버스에 유채, 130x225㎝, 오르세미술관, 알렉산드르 카바넬.
이상적인 여성의 모델인 비너스는 그림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 알렉산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등의 작품에서 비너스들은 모두 완전히 혹은 반쯤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자신을 온전히 내보여주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남성들에게 전혀 낯선 존재, 즉 판타지 혹은 신비로 기능한다는 의미다.
네덜란드 화가로 신조형주의를 창시한 피에트 몬드리안 역시 눈 감은 여자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다. 수직과 수평만으로 된 미니멀 추상화를 그렸던 그도 젊은 시절엔 구상회화를 그렸다.
드물게도 그가 남긴 여성 초상화는 여성에 대한 소심함과 두려움이라는 무의식적 감정을 드러낸다. 결벽주의자였던 몬드리안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처음부터 그가 결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09년 작품이 팔리기 시작하던 해 전통적인 가족을 이루고자 하는 용기를 갖고 약혼하지만 그 관계는 곧 끝장난다. 특히 증명사진처럼 그린 여성 초상화를 보면 그가 여성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경직돼 있는지 알 수 있다. 혐오스럽거나 끔찍한 초상화가 아니라 딱딱하고, 어색하고, 어둡고, 부드럽지 못한 초상화. 오히려 눈을 감고 있는 여성 초상화는 훨씬 더 부드럽고 아기자기하며 소녀스럽지만 그것도 기이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마 눈 감은 여자를 보고 두려움보다는 안심과 안락감을 느꼈던 감정적 체험을 그린 것 같다.
화가들이 눈 감은 여자를 그리는 맥락과 비슷한 이유로 서양미술사에서는 체모 없는 여자들이 수없이 그려졌다. 서양미술에서 남성의 성기는 대체로 큰 문제없이 허용돼왔지만 여성 성기는 그렇지 못했다. 19세기가 돼서도 여전히 여성 성기는 마치 세상에 없는 것인 양 취급됐다. 그래서 특유의 형태도 털도 없는, 마치 소녀 같은 성기를 지닌 여성 혹은 무모증에 걸린 여성들이 넘쳐난다.
서양미술사에서 여성 성기에 체모를 그리지 않은 것은 왜일까? 그것은 여성을 누드로 만드는 것과 관련 있다. 케네스 클라크는 나체는 그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전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드화의 진짜 주인공이 관객, 즉 주문자이자 감상자인 남성임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 누드는 성적 충동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해야 했기에, 누드에는 체모가 없다. 털로 뒤덮인 여성 성기는 남성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했기 때문이란다.
어쨌거나 여성들의 체모 제거 행위는 그녀들 자신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생성된 문화가 아닌, 남성들이 원하는 몸 만들기의 일환이었음을 배제할 수 없다. 즉 치모가 자라지 않은 어린 여자에 대한 취향, 치모가 환기하는 두려움과 공포 혹은 원죄의식이라는 집단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체모 없는 여자들은 남성들이 원하는 이상적 여성상의 반영인 셈이다.
역으로 체모를 그린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체모는 정욕, 성적인 힘과 관련된다. 성적으로 정열적인 여성은 감상자(주문자)로 하여금 만만하게 그녀를 장악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즉 체모가 무성한 여성은 욕망의 주체가 되는 팜므파탈 같은 여자라는 인식이 대세였다. 그런 까닭에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남성에게 체모가 그려진 여성 누드는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해야 하며,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에 대부분 체모 없는 누드가 그려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작품이 스페인 왕실화가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다. 1800년대 초 그의 작품이 발표되자마자 가톨릭 사회였던 스페인은 혼란에 휩싸였고 고야는 ‘이단죄’로 종교 재판을 받게 됐다.
당시 누드화는 신화나 성경 속 인물을 대상으로 그려졌지만 ‘벌거벗은 마하’의 주인공은 현실의 여인이었다.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질문에 고야는 “제가 사랑했던 여인입니다”라고만 말하며 끝내 대답을 회피했다. 스페인 최고의 명문가인 알바 공작부인이 주인공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다. 고야가 죽고 알바 공작 집안에서는 그 여인의 결백을 입증하고자 무덤을 파헤치는 등 해프닝을 벌였지만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스페인의 프라도미술관에 전시 중인 ‘벌거벗은 마하’는 그래서 더 이상 누드가 아닌 최초의 나체화로 평가받는다.
출처- [ⓒ 매일경제 & 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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