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응용 - How?

여자의 방

다연바람숲 2017. 3. 16. 13:03

여자의 방

“500파운드와 자신만의 방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자유를 누리는 습관과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그때 기회는 찾아올 것입니다.” 일찍이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을 갖기를 주장했다. 그녀에게 방은 그저 물리적인 공간 이상의 것, 여자만의 시간, 여자만의 일, 여자만의 꿈이었다.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예의 김서령(작가)

아이를 키우는 주부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해요. “세월이 갈수록 내가 없어지는 것 같다”고. 그런 게 어찌 보면 공간의 부재에서 오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와 남편의 공간에 밀려 아무것도 갖지 못하니까.

‘엄마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보여줄 수 있도록 실재하는 공간이 있어야 해요. 공간은 그 안의 물건과 어떤 행동으로 그 사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니까요. 그래서 사람에겐 꼭 자기를 증명할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해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돈이 있어야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해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이 늘 머무는 곳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어요. 부엌을 밥 먹는 곳으로만 쓰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도 붙이고 책도 가져다놓고. 자기가 자주 머무는 공간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요.

나의 공간은 여기예요. 현관 입구에서 부엌으로 들어오는 길 양옆에 놓인 책장, 거기에 자리한 두 개의 좌식 책상들. 책상 위에는 각기 다른 책이 꽂힌 독서대가 있어요.

나는 ‘구(具)’를 좋아해요. ‘시(時)’하고 ‘공(空)’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물건들은 내가 조절할 수 있잖아요. 좋아하는 것들을 채우는 것만으로 나는 살아나요.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로 채운 곳이 내 공간이고,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바라보는 것이 내 시간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한 공간 속에 살 때 제일 기분이 좋고.

그런 게 자아실현이라고 말하긴 거창하지만, 만족스러운 삶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말 있잖아요.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고. 사람의 손으로 공간을 만들지만, 결국 그 공간은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놓아요.

우리를 북돋게 하는 공간은 어디에든 있어요. 당신이 자유로워지는 공간에 머물러야 해요. 그게 당신 삶에 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여자만의 방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꼭 필요한 거예요.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예의를 다함에 있어서.


딱 나를 닮은 공간 장보현(sustain life 운영자, 작가)

남편과 나는 서울 통인동에 있는 한옥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어요. 한옥이란 것, 다들 아시잖아요. 기본적으로 규모가 작고, 또 쉽게 구조를 바꿀 수도 없는 어려운 집이라는 걸요. 이 집에서 문을 닫을 수 있는 곳이라곤 침실뿐이에요. 다시 말해 거실 하나, 부엌 하나, 침실 하나가 전부죠.

이런 집에서 나만의 방을 갖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죠. 나는 한동안 궁리했어요. 어떻게 하면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물리적으로 문이 닫힌 공간은 아니지만, 내가 마음을 먹는다면 어떻게든 탈바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건 순전히 의지의 문제였어요. 좁은 집, 한옥의 한계를 극복하며 좀 더 가변적으로 공간을 활용해보기로 했죠. 거실 한쪽에 나만의 소파와 테이블을 놓았어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도자기와 그릇들, 나의 사진, 나의 금붕어….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둘러싸고 앉아 조용히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려요.

작업 테이블은 부엌에서 찬장으로 쓰던 나무 판을 떼어 만든 것이에요. 그러니까, 세상에 유일한 나만의 것. 나만의 공간은 내 취향을 오롯이 담은 공간이에요. 거실 한쪽이라는 게, 물리적으로 문이 닫힌 공간은 아니에요. 분리될 수 없지만, 그래도 분리할 수 있는 곳. 나의 의지로 열렸다 닫히는 공간. 그곳에서 나는 부족함 없이 글을 쓰고 사색을 해요.

 

아내, 엄마가 아닌 내가 되는 곳 김지은(thepartyday 대표, 플로리스트)

20대에 춘천에서 상경해 줄곧 혼자 살았어요. 그땐 집 안에 작업실을 만들어 일과 생활을 병행했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결혼은 일생일대의 변화를 불러온 큰 사건이었어요. 누군가와 공간을 나눠 써야 했고, 일과 생활을 분리해야 했으니까.

걱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결혼할 때 남편에게 이것만은 꼭 지켜달라고 했죠. 일과 작업실 말예요. 좁은 집에 여건이 안 되면, 집 밖에서라도 꼭 작업실을 마련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일이야말로 나를 오롯이 ‘여자’로서 자립할 수 있게 하는 힘이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이 바로 ‘공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집 근처에 작은 작업실을 마련했어요. 꽃시장에서 꽃을 사서 한가득 펼쳐놓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무념무상으로 일할 수 있는 곳. 누구의 방해도 없이, 나를 위한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

이곳에서 나는 친구들을 불러 함께 저녁을 먹기도 하고, 사람들을 모아 플라워 클래스를 해요. 그럴 때 나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특히 아이가 태어나고 작업실의 의미는 더욱 커졌어요. 이곳에서 나는 남편을 위한 아내도 아니고, 아이를 위한 엄마도 아니에요. 여자 김지은, 딱 내가 되는 느낌이에요.

사실, 집 밖에 공간을 따로 마련한다는 건 경제적인 부담이 따라요. 적은 돈이 아니죠. 그래서 월세를 내기 위해 일을 억지로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게 안타깝다거나 슬프지는 않아요. 그런 것들보다 이 공간이 제게 더 많은 감동을 채워주고 있으니까요.


나는 여기서 꿈을 꾼다 이희경 (H by angie 대표, 인테리어 디자이너)

결혼한 지는 7년쯤 됐어요. 오랫동안 나만의 공간을 갖지 못했죠. 남편과 함께하는 모든 것이 좋았지만, 가끔씩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대단한 무언가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거나 이런저런 영화를 보면서 졸거나 하는 거죠.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의 취향이 같을 순 없으니까. 상대에게 강요할 순 없고, 그렇다고 나의 취향을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고요. 상대에게 맞춰진 내가 아닌, 온전히 ‘나’다운 모습을 찾고 싶을 때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3년 전쯤, 침실 옆에 조그만 공간을 마련했어요. 책상을 두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웠죠. 물론 침실은 남편과 함께 사용하는 곳이지만, 잠을 자기 전까지는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이에요. 그때까지는 자유롭게 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인 거죠.

침실 옆 나만의 공간을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한 건 정리가 잘되는 곳이어야 했어요. 번잡한 바깥세상에서 벗어나 이곳에서만큼은 쉼표를 찾고 싶었거든요. 책상도 서랍이 많은 것을 구해 잡다한 물건은 집어넣고,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를 땐 직접 만든 타공판에 메모를 붙여놓고요.

그런 곳에서 대체 뭘 하냐고요? 인테리어 작업을 위한 도면 작업을 해요. 인테리어 매거진도 보고 음악도 듣고요. 그렇게 영감을 얻고, 생각한 것을 실물로 표현하는 공간은 나 홀로 꿈을 꾸는 곳이에요.


한 뼘 휴식처 박유빈(사진가)

첫째 아이는 허니문 베이비예요. 신혼의 달콤함을 즐길 틈도 없이 아이를 키우면서 정신없는 날들을 보냈죠. 우리의 첫 집은 여느 신혼부부가 그렇듯, 작은 집이었어요. 세 식구가 살기에도 빡빡한.

둘째가 생기고 가족이 늘면서 큰 집으로 이사를 했어요. 그때 나는 곧 죽어도 나의 방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고, 결국 해냈어요. 나는 그곳을 ‘일하는 방’이라고 불러요. 아이들이 어릴 적, 그러니까 나의 방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땐 정말 가관이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은 책상을 뒤엎었고, 뒤죽박죽 섞여 있었으며 물건이 온전히 남아나질 않았어요.

생각해보면, 내 공간이 따로 없었을 땐 쉽게 화를 냈던 것 같아요. 조그만 일에도 짜증이 났어요. 내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때문인 것 같아요. 그때는 아쉬운 대로 다이어리를 썼어요. 당시 일기장은 나만의 방이었어요.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가방에 쏙 넣고 다니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내밀한 무언가. 궁여지책이었죠.

그러다가 결혼 5년 만에 나만의 방을 만들었어요. 남편이 직접 만들어준 나무 책상과 컴퓨터, 책장, 카메라가 전부인 단출한 방이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이에요. 이곳에서 나는 일을 해요. 내게는 그게 휴식이 돼요.

종일 육아에 지쳐 쓰러질 듯했던 몸도 내 방에 들어오면 다시 힘이 솟아요. 일하는 것도 분명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급속 충전되거든요. 그리고 방 한쪽에는 나의 마음을 담아두기도 해요. 내가 좋아하는 사진, 말린 꽃과 책. 그것이 내게 위안을 줘요.

기획_조한별 | 사진_전택수, 박유빈
여성중앙 2016.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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