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단상 - 바람엽서

여지(餘地)

다연바람숲 2017. 3. 15. 18:19

 

 

 

여지(餘地)

 

 

나는 속리산에 가고 싶다고 했다

단풍이 꽃불처럼 번지는 산,

나는 가을이 보고 싶다고 했다

 

속세를 이별할 일은 없었지만

속세를 잊을 일은 넘쳐났으므로

도피거나 피난이거나

부질없는 하루의 은둔일지라도

당신은 숨을 곳을 알았고 함께 가자 했다

 

떠나자 한 날이 있었으나

떠나지 못한 날들이 흘러갔다

당신이 그리고 있던 나의 초상화가

완성되지 못하는 시간들이 또 흘러갔고

기다림은 지루하였으나 계절에는 가속이 붙어

쌓인 낙엽 위로 이른 첫눈이 내렸다

도피할 수 없는 시간의 폭력 앞에서

우리는 서로 무기력하거나 무심하였고

끝내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만 남았다

 

다시, 당신은 속리산에 가자고 했다

거기 눈 속에 파묻힌 당신이 그린

그림 같은 집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단풍이 모두 졌다고 했다

너무 늦은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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