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가게를 습격한 얘기를 아내에게 한 게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아마 그건 옳으냐 옳지 않으냐 하는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요컨대 세상에는 옳지 않은 선택이 옳은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고, 옳은 선택이 옳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부조리- 라고 불러도 상관없겠지- 를 회피하려면 우리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고, 대체로 난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것이며,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page 9 <빵가게 재습격>
코끼리의 소멸을 경험한 후로 나는 곧잘 그런 기분이 든다. 뭔가를 해보려고 하다가도, 그 행위가 초래할 결과와 그 행위를 회피함으로써 초래될 결과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때때로 주변 사물들이 본래의 정당한 균형을 잃은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코끼리 사건 이후 내 안에서 뭔가의 균형이 무너져버려, 그 때문에 외부의 여러 사물이 내 눈에 기묘하게 비치는지도 모른다. 그 책임은 아마 내 쪽에 있을 것이다.
page 77 <코끼리의 소멸>
"왠지 모르지만 때때로 무서워, 미래란 거." 여동생은 말했다.
"좋은 면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하면 돼. 그러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나쁜 일이 생기면 그 시점에 생각하면 되는 거야."
page 132 <패밀리 어페어>
모든 것은 상실되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것은 상실되었고, 계속해서 상실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손상된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일은 아무도 할 수 없다. 지구는 그 때문에 태양의 둘레를 계속 회전하는 것이다.
page 154 <쌍둥이와 침몰한 대륙>
이곳은 말 그대로 유럽 세계의 끝이었다. 그곳에선 세계의 끝의 바람이 불고, 세계의 끝의 파도가 일고, 세계의 끝의 냄새가 풍겼다. 좋든 싫든 한 세계의 끝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곳에는 피할 수 없는 어떤 퇴영의 색채가 있었다. 거기서 나는 이물의 영역에 조용히 삼켜지는 느낌을 받았다. 말단 너머에 있는 어딘가 막연한, 그러면서 기묘하게 친절한 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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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내가 이런 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주위 풍경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공기를 아무리 들이마셔도, 나라는 인간의 존재와 유기적으로 연결지을 수가 없었다. 난 대체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나 싶었다.
page 239~240 <식인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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