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신경숙

다연바람숲 2015. 5. 23. 19:05

 

 

 

 

고흐의 친구가 고흐에게 삶의 신조가 무엇이냐? 묻는다. 친구의 질문에 고흐의 답변은 이와 같았단다.

" 침묵하고 싶지만 꼭 말을 해야 한다면 이런 걸세.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산다는 것. 곧 생명을 주고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보존하는 것. 불꽃처럼 일하는 것 .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하게, 쓸모 있게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것. 예컨대 불을 피우거나, 아이에게 빵 한 조각과 버터를 주거나, 고통받는 사람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는 것이라네."

 

                                                       <하느님의 구두> 중 page 30

 

 

 

사람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거야. 순간순간 잘 살아야 되는 이유지. C선배 얘기를 듣는데 가슴이 서늘했어. 살아오는 동안 어느 세월의 갈피에서 헤어진 사람을 어디선가 마주쳐 이름도 잊어버린 채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을 때, 그때 말이야,

   나는 무엇으로 불릴까? 그리고 너는?

 

                                                        <너, 강냉이지?> 중  page 37

 

 

 

- N.....어젯밤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어쩌면 큰 힘이 되어줄지도 몰라. 이제 겨우 우리가 서른인데 말이야,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이 세상일이 힘겨울 때면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나는 뱀도 먹은 년이다.

  정피디는 아주 진지했다. 어제 밤새도록 생각해낸 말인 모양이었다.

- 뱀도 먹은 년인데...... 내가 뭘 못 하겠냐, 이렇게 생각하면 N은 앞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야. 안그래?

  정피디의 발이라도 콱 밟아줘야 분이 풀릴 것 같던 N은 그만 웃음이 터져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버렸다.

       그래, 나는 뱀도 먹은 년이다!

 

                                                         <인생 수업> 중 page 122

 

 

 

바닷바람 속을, 오름의 바람 속을, 농원의 바람 속을...... 걷다보면 지금보다는 지난 일들이 투명하게 되비쳐오는 때가 잦아 나도 모르게 깊은숨을 쉬곤 하지. 바람은 거울인지도 모르겠어. 어떻게 그걸 이겨내고 이 시간으로 오게 되었을까 싶은 일도 그냥 담담하게 떠오르곤 해. 오래 잊고 지냈던 사람들의 얼굴이 바람에 실려와 잠시 머무는 때도 있지. 그렇게 계속 걷다보면 이젠 생각이 과거를 지나 현재를 지나 미래로 뻗어나가지. 걷는다는 일은 온몸을 사용하는 일이잖아. 이곳에서 걷기 시작하면서 걷는 일은 운동이 아니라 휴식이 아니라 미래로 한발짝 나아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 어떤 일에 끝이란 없다는 생각도 들어. 내가 내 태생지를 떠나왔지만 그 주소를 아직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가 이 현재에 무엇인가를 자꾸 그곳으로 보내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 그런 것 같아.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듯이 모든 일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어. 작별도 끝이 아니고 결혼도 끝이 아니고 죽음도 끝이 아닌거지. 생은 계속되는 거지. 제어할 수 없이 복잡하게 얽힌 채 다양하고 무질서한 모습으로, 이따금 이런 시간, 누군가 만들어놓은 이 바닷가 우체국에서 잠깐 머무는 이런 시간, 이렇게 홀로 남은 시간 속에서야 그 계속되는 생을 지켜보는 마음과 조우하게 되는 거지.

 

                                                        <바닷가 우체국에서> 중 page 188 ~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