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다연바람숲 2014. 11. 26. 13:55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켈수스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특별한 태도는 몇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전제는 단독으로 또는 결합되어서 이 태도를 뒷받침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이 되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사랑에 대해서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가정에 이르게 하는 세 번째 오류는 사랑을 '하게 되는'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돈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 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배우고 싶다면 우리는 다른 기술, 예컨대 음악이나 그림이나 건축, 또는 의학이나 공학 기술을 배우려고 할 때 거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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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기술인가?

질문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사랑이 그저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라면, 그에 따르는 지식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는 전제로 에리히 프롬은 사랑에 대한 이론과 실천, 기술 숙달이 궁극적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사랑의 기술에 대한 편리한 지침, 혹은 연애의 자유로운 기술따위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실망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방법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사랑의 가치에 대하여, 사랑의 기술이 단순한 테크닉을 넘어 예술이 되는 이유에 대하여, 하나의 예술로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역사를 거치며 인류의 사랑이 어떻게 진화하는지, 출생과 성장을 거치며 인간의 사랑이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하는지,

사랑의 대상과 종류, 사랑의 개념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인간론, 인간의 실존론으로부터 사랑의 이론은 츨발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가치에 밀려 평가절하되고 있는 사랑과 점차 자아의 상실과 더불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해가는 인간에 대하여 깊고 진지하게 고찰한다.

 

그러나 책의 전반을 차지하는 그 어떤 이론도, 그를 뒷받침하는 그 어떤 철학도, 에리히 프롬이 머릿말에 남긴 저술의 의지만큼 사랑의 기술이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간결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의 퍼스낼리티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또한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주려고 한다."

 

기술을 요하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 성숙을 위한 절차일 뿐이며 결국 사랑은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참된 자질, 인성과 근본이 바로 갖춰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사랑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에 바탕을 둔 사랑과 사랑을 일으키는 힘에 대하여 에리히 프롬은 마르크스의 사상과 표현을 빌어 제시한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을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 . .. . 당신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 자' 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관계 속의 사랑이란 인간을 인간으로서, 사랑을 사랑으로서 스스로 일깨울 때 가능한 것이며 결국 사랑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타인에게 뻗어나가는 것임을 의미한다.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하려 해도 안된다. 사랑하려고 하면 할수록 실패하고 고립되고 고독하고 무능력은 불안해지고 사람은 두려워진다.

이럴 때 사랑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가 된다. 사랑을 회복하는 데도 절실하게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랑하려고 애쓰면서도 사랑에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는 기술의 미숙함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기술은 성숙한 사랑을 꿈꾸는 우리의 알 권리이며, 습득해야할 지식이며, 최고의 해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