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나의 침묵은 / 조용미
불행이란 몸을 가짐으로써 시작되는 것
몸이 없다면 어디에 불행이 있을 수 있을까*
봄날 나의 침묵은 꽃 핀 나무들로 인한 것,
하동 근처 꽃 핀 배나무밭 지날 때만 해도
몸이 다시 아플 줄 몰랐다
산천재 앞 매화나무는 꽃 피운 흔적조차 없고
현호색은 아직 벌깨덩굴 곁에 숨어 있다
너무 늦거나 빠른 것은 봄꽃만이 아니어서
한잎도 남김없이 만개한 벚꽃의
갈데로 다 간 흰빛을 경멸도 하다가
산괴불주머니 텅 빈 줄기 푹 꺼져들어가는 속을
피리소리처럼 통과해보기도 하다가
붉은 꽃대 속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몸이 견딜 만하면 아팠던 때를
잊어버린다 내 몸이 늘 아프고자 한다는 걸,
누워 있으면 서 있을 때보다 세상이 더
잘 보이는 이유를 또 잊어버린다
통증이 살며시 등뒤로 와 나를 껴안는다
몸을 빠져나간 소리들 갈데 없이 떠도는
꽃나무 아래
*노자 『도덕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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