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이런 이별 / 김선우

다연바람숲 2015. 1. 26. 11:34

 

이런 이별

 — 일월의 저녁에서 십이월의 저녁 사이

 

      김선우

 

 

 

   그렇게 되기로 정해진 것처럼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오선지의 비탈을 한 칸씩 짚고 오르듯, 후후 숨을 불며.

   햇빛 달빛으로 욕조를 데워 부스러진 데를 씻긴 후

   성탄트리와 어린 양이 프린트된 다홍빛 담요에 당신을 싸서

   가만히 안고 잠들었다 깨어난 동안이라고 해야겠다.

 

   일월이 시작되었으니 십이월이 온다.

   이월의 유리불씨와 삼월의 진홍꽃잎과 사월 유록의 두근거림과 오월의 찔레가시와 유월의 푸른 뱀과 칠월의 별과 꿀, 팔월의 우주먼지와 구월의 청동거울과 억새가 타는 시월의 무인도와 십일월의 애틋한 죽 한 그릇이 당신과 나에게 선물로 왔고

   우리는 매달리다시피 함께 걸었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 괜찮은 거야.

   마침내 당신과 내가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십이월이 와서,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리고

   우리는 천천히 햇살을 씹어 밥을 먹었다.

 

   첫 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두 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세 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그리고 문 앞의 흰 자갈 위에 앉은 따스한 이슬을 위해

 

   서로를 위해 기도한 우리는 함께 무덤을 만들고

   서랍 속의 부스러기들을 마저 털어 봉분을 다졌다.

   사랑의 무덤은 믿을 수 없이 따스하고

   그 앞에 세운 가시나무 비목에선 금세 뿌리가 돋을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으므로 이미 가벼웠다.

   고마워. 사랑해. 안녕히.

 

   몸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일월이 시작되면 십이월이 온다.

 

   당신이 내 마음에 들락거린 십년 동안 나는 참 좋았어.

   사랑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다행히 하고픈 말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