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순수 - 비우는말

어쩌면 탱고 / 이병률

다연바람숲 2014. 12. 12. 16:07

 

그 날도 난 그 곳에 갔다. 그날은 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는데 몇몇 외국인 커플도 탱고를 배우기 위해 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스위스에서 왔다는 '세실'이라는 이름의 너도 그들 틈에 끼여 있었다. 늘씬했고 진지해 보였고 무엇보다 인상이 부드러운.

강사는 나와 너를 앞으로 불러내어 지금까지 익힌 간단한 동작들을 해 보이라고 말한다. 나는 창피했지만 네 손을 잡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게 괜찮아진다. 내가 너의 발을 밟을 때마다 우릴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웃었지만 그럴 때마다 넌 더 열심이다.

내가 자꾸 너의 발을 밟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두 손을 들어 보였더니 강사는 벽에 붙여놓은 사진 한 장을 가리킨다. 알 파치노가 주연한 영화 <여인의 향기> 포스터였는데 거기엔 이렇게 써 있다.

 

<잘못하면 스텝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추면 돼요.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지요.>

 

그 문구를 읽는 순간 , 내 앞에 벌어진 모든 상황들이 로맨틱하게 다가온다.

로맨틱한 뭔가를 원하는 사람들이 탱고를 배우려 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내가 자연스럽지 못하게 손수건을 꺼내 너의 구두를 닦아 주려고 하는데 너는 그러지 말라며 내 손을 잡았고 다른 한 손으로 구두 콧등을 쓱쓱 닦아낸다. 너는 고맙다고 웃으며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차례로 나가 스텝을 익히고 나자 10분간의 휴식 시간이 있었고 강사는 특별히 시범을 보여준다면서 조수쯤으로 보이는 여인과 탱고를 추기 시작했다.

춤을 추는 두 사람은 잔잔한 호수를 걷는 새들처럼 부드럽고 날렵하다. 나는 순간 탱고의 의식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 조금이라도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절대 출 수 없는 춤, 저런 춤을 추는데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순간, 벽에 붙은 포스터의 글씨가 이렇게 읽히기 시작한다.

 

<사랑을 하면 마음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놔두면 돼요. 마음이 엉키면 그게 바로 사랑이죠.>

 

이병률 산문집 <끌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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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가 없는 삶이란 없다.

실수하지 않는 사랑도 없다.

 

실수하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실수할까 두려워서 시작하지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스텝이 엉켰다면 그대로 추면 된다.

이미 당신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므로.

 

마음이 엉킨다면 그대로 놔두면 된다.

그건 당신이 이미 사랑을 시작했다는 의미가 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