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찾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잊기 위해 열차를 타본 적이 있다. 어디를 가도 그사람과 관련된 얼토당토않은 연결고리를 찾아내어 속수무책으로 그리워하는 내 자신과 결별하기 위해서였다. 열차 안에 있으면 매 순간 다른 곳에 있게 되니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추억은 항상 장소와 연관되어 있으니 장소와 나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면 일상 곳곳에서 발목을 잡는 끈질긴 추억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을까. 그러나 웬걸, 그리움은 이제야 물을 만났다는 듯 맹렬히 심장을 할퀴었다. 평소에는 '정신 차리고 일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버티고 , ' 다시 만날 수 없다' 는 절망 때문에 억눌렸던 그리움이 기차를 타니 비로소 고삐가 풀려버린 것이다.
나는 열차에 탄 동안만은 내그리움을 짖누르지 않기로 했다. 차라리 마음껏 그리워하자. 그리움도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저 살려두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움을 제멋대로 놓아주니 비로소 그리움이 내 영혼을 아프게 짖누르지 않았다. 그리움은 반드시 슬픔과 연관되는 감정만은 아니었다. 그리움에는 다른 감정에는 없는 또 하나의 깊은 희열이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뿐 아니라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모든 사람들, 웬일인지 모르게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을 그리워하기 좋은 장소. 그곳은 먼 나라에서 무작정 타는 열차 안이었다. 내게 누군가를 하루 종일 그리워하는 법을 가르쳐준 공간이 바로 유럽의 가지각색 열차들이었다.
정여울 <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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