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단상 - 바람엽서

春來不似春

다연바람숲 2012. 2. 17. 20:11

봄날은 간다란 김윤아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무심히 가는 봄날과 무심히 지는 꽃잎과...

삶의 중년을 넘긴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

봄날은 분명코 지났을 것인데, 다시 또 봄날은 올 것인지

이 아침 제 자신에게 반문을 해봅니다.

 

라고

오랫동안 알고지낸 여인으로 부터 오늘 아침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출근하려는 시간 차창에 쌓인 흰눈을 지우던 시간이었습니다.

입춘이 지나 절기로는 벌써 봄인데 매운 바람에 손끝이 시려오는 날이었습니다.

봄은 봄이로되 내 마음은 봄이 아니로다

봄이면 우리 지아비 입에 달고 사는 그 말이 오늘은 아침부터 입에 착 감겨왔습니다.

 

해마다 입춘 지나면 하마 봄을 맞은듯 봄에 관한 시편부터 골라 읽던 오랜 습관도

올해는 어찌된 일인지 봄이라는 말에도 둔해져서 입춘조차 잊고 지나왔습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봄,

연하디 연하고 순하디 순한 연두가 그려지는 삼월도 삼월이란 말도

삼월의 햇살 삼월의 바람 삼월의 나무 삼월의 꽃... 모든 삼월을

나는 에둘러 달아나고 싶어할 뿐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는 걸 문득 깨닫습니다.

그 이유를 힘겹게 지워내고야 비로소 삼월에 대한 기다림에 안도감을 갖습니다.

창밖으로 황망하게 눈보라가 지나갑니다.

누군가가 저 눈보라 지나듯 이 추위가 지나고나면 곧 봄이 올거라 말을 합니다.

기다리지않아도 봄은 온다고 했던가요?

눈보라를 바라보며 꿈꾸는 봄이 새삼 고요하고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오늘 아침 문자를 보내 준 그 여인에게 조금 늦게 답장을 했습니다

 

봄은 아직 가지 않았어요.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는한 우리 세대에게도 봄은 남아있어요.

다만 우리 봄날에 피는 꽃들의 색깔이 조금 다를 뿐이어요.

나는 아직 봄을 기다려요.

 

라고요.

 

 

 

 

昭君怨(소군원) / 東方虬(동방규)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하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을.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하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을.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으리.

자연히 옷에 맨 허리끈이 느슨해지는데

이는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네.

 

 

*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소군원(昭君怨)’이란 시를 지어 흉노에게 시집을 가야만 했던 전한(前漢) 때 미인 왕소군(王昭君)의 심정을 대변했는데, 여기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구절을 사용했다. 즉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라고  고국을 떠나 오랑캐의 땅에서 봄을 맞는 맞는 왕소군의 심정을 노래했다.

*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에, 먼저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경성(京城)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오직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지라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漢)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 58∼ BC 31)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자,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릿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과 못 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 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녀의 애칭을  "낙안(落雁)"이라 불었다고 한다.

 


※ 王昭君(왕소군)

 

이름은 장(檣 ·牆). 자 소군(昭君).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이고 장이 자라고도 한다. 남군(南郡)의 양가집 딸로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비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匈奴)의 침입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그들과의 우호 수단으로 흔히 중국 여자를 보내어 결혼시키고 있었다. BC 33년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연지(閼氏)가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야가 죽은 뒤 호한야의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러한 소군의 설화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윤색되고,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전하여 왔으나 대부분은 사실(史實)로 인정할 수 없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어 버렸다. 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晉)나라 때에는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이라 하였고, 명비(明妃)라고도 불렸다. 그 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허다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소군사(昭君辭)》《명군탄(明君歎)》이라는 한나라의 악부(樂府)가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그녀를 소재로 한 희곡으로는 원(元)나라 때의 마치원(馬致遠)이 지은 《파유몽고안한궁추잡극(破幽夢孤漢宮秋雜劇:漢宮秋)》이 가장 유명하다. 진나라의 석계륜(石季倫)이 지은 《왕명군사병서(王明君辭幷序)》가 있고, 당(唐)나라 이후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소재로 시를 읊었다. 또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명비변문(明妃變文)》에 의하여, 당말 오대(五代)경부터 구전문학(口傳文學)의 소재가 되었음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