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순수 - 비우는말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이고 어떤 일도 견뎌내는 게 인간이더라

다연바람숲 2017. 9. 25. 17:32

 

 

 

 

 

 

 

 

널 위해서가 아니야. 당신은 내 속에서, 언제까지나, 마지막 보여주었던 그 모습처럼, 나의 피투성이 연인으로 남아 있어야 해. 지나고 보면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이고 어떤 일도 견뎌내는 게 인간이더라. 뭘 못 견디겠어. 오늘 밤 돌아가 당신 파일을 열어 하나하나 딜리트 키를 누르고 가려움도 딜리트 키를 눌러버리고. 그렇게 견뎌볼까 봐. 차갑긴 하겠지만 마지막 보았던 당신의 얼굴을 껴안고 말이야. 당신은 언제까지 나를 물어뜯으며, 나의 연인으로 남아 있어야 해. 피투성이의 연인, 잔혹한 연인. 당신이 특별히 가혹한 사람이란 생각은 안 해. 모든 연인은 더 사랑하는 자에게 잔혹한 존재이니까.

 

  사랑이 아름답고 따스하고 투명한 어떤 것이라고는 이제 생각지 않을래. 피의 냄새와 잔혹함. 배신과 후회가 없다면 그건 사이보그의 사랑이 아닐까 싶어. 당신, 전등사 갔던 날 기억나? 사랑도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어. 전등사를 보지 못한 그날을 전등사 갔던 날, 로 이름 지었듯 뭔가가 빠져 있는 그대로 그냥 사랑이라고 불러주는 거지.

 

 

                                                                                 -   정미경 <나의 피투성이 연인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