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타르쵸 깁는 남자 / 김석윤 시집

다연바람숲 2014. 12. 15. 14:44

 

타르쵸 깁는 남자 / 김석윤

 

라싸 가는 길목

경전이 적힌 오색 깃발을

테두리 천으로 잇대어 재봉질하는 남자

 

한때 마방이었던 그의 발밑

기다랗게 늘어놓은 테두리천은

해 떨어지기 전 다다라야 할 차마고도,

지상에서 가장 높은 길 걷던 발이

낡은 재봉틀 발판을 디딜 때마다

굽이 닳은 의자가 절룩거린다

 

궁을궁을 벼랑길이 그랬듯

느닷없이 끊긴 실, 침 묻혀 이어 가며

글 한 줄 모르는 까막눈으로

줄줄이 경전 엮어 낸다

이제 그의 교역품은

허공에 바람으로 흩어질 말씀

 

기워도 기워도 흔적조차 없는

가난한 말씀을 종일토록 박음질한다

새와 쥐의 길을 사람의 길로 바꿔 놓았듯

하늘에 가장 가까이 내걸릴

저, 허공장경!

 

바람 잘 날 없는 생은, 늘

경전 소릴 들을 것이다

그 어떤 주석도 달리지 않은 원문 그대로

한 올 한 올 풀리는

말귀 알아들을 것이다

 

 

#

 

 

그의 시집이 도착했다.

오래 전의 약속이었지만 늘 기약없는 기다림이었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고 올해를 겨우 스무날 남겨두고 그의 약속이 도착했다.

 

타르쵸 깁는 남자가 시집의 제목이다.

한 땀 한 땀, 그가 기워낸 시의 언어들이 줄줄이 시집으로 엮어졌다.

바람 잘 날 없는 생에 대하여, 그의 기억이, 그의 시선이, 그의 삶이 엮어낸 시어들은

이제 더이상 어눌시인의 집에 갇힌 언어가 아니라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타르쵸가 되었다.

 

그는 허투루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없다.

풀섶의 나도사초에서부터 차마고도의 타르쵸에 이르기까지

그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하여 그의 관조는 진지하고 따스하면서도 삶을 유추하는 직관을 지녔다.

 

그는 완도의 시인이면서 또한 나주의 시인이다

그래서인가 그의 시편들 속에서는 하나같이 곰삭은 홍어의 맛이 난다.

싱싱한 활어의 맛이 아니라 묵히고 묵혀 발효되고 숙성된 맛,

가끔 인사동을 소풍처럼 나서고 어쩌다 옌징 여인의 눈물버캐에 마음을 빼앗겨도,

그는 천상 지리산의 시인이고 영산강의 시인이다.

 

그의 시편들 속엔 허망하게 쓰러지는 가장의 비애가 있고,

순탄치 못한 생의 밑바닥을 고이는 사내가 있고,

밟히고 밀려도 다시 일어서야하는 고단한 중년이 있고,

마음의 도래지를 찾아 굴곡진 길을 걸어가는 인생의 닳고 닳은 뒷굽이 있고,

길과 들과 강과 벽, 삶의 무수한 다른 이름들이 있다.

 

그 다른 이름들이 또한 그의 삶이고, 그가 속한 세계이고, 그의 언어여서

연민 어린 그의 시선과 시어들이 더 진솔하고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홍어 장수 김씨의 봄으로부터 타르쵸 깁는 남자가 시집으로 엮어지기까지

꼬박 9번의 봄과 10번의 겨울을 지나왔다.

 

이 시대의 중년으로 산다는 것, 이 세상에서 가장으로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고비를 횡단하고, 타르쵸를 깁는 일과 다르지않을 것이지만,

삶과 삶의 배경과 이유들이 변화하는 시간동안 그의 시도 진화를 거듭하면서

삶의 짬짬이 치열하게 말을 다듬어 이제 그만의 언어로 그의 경전을 완성시켰다.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얼마나 철저한 도덕적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자신의 말과 글에 대하여도 얼마나 엄격하고 고집스런 잣대를 유지하는지

그를 알지못하는 사람도 그의 시집을 펼쳐읽다보면 알게 될 것이다..

비록 남들보다 늦은 출발이지만, 그의 시집 타르쵸 깁는 남자가 값지고 의미있는 것도 그런 연유이다.

 

십년의 열정을 쏟아냈으니 앞으로 그가 다시 그려낼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일지 기대를 해본다.

 

그리고. . .

오랜 산통을 겪은만큼 멋진 시집을 내신 김석윤 시인님께 진심어린 축하를 전합니다.

'창너머 풍경 > 열정 - 끌리는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 여기가 맨 앞 / 이문재  (0) 2015.01.07
탁본 / 이영광  (0) 2014.12.27
살생부 / 이영광  (0) 2014.12.12
진동하는 사람 / 이병률  (0) 2014.11.18
가을밤 / 조용미  (0) 2014.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