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살생부 / 이영광

다연바람숲 2014. 12. 12. 14:06

 

살생부 / 이영광

 

영 아닌 인간들은 수첩에서,

요즘 같으면 휴대폰 전화번호부에서 아예

이름을 지워버린다는 글을 읽으면, 냉장고에서

술을 꺼낸다

 

모두들, 살생부 하나쯤은 가지고 사는 걸까

상상도 상징도 뭣도 아니고 그냥

존재 자체를 그어버린다는,

그 칼질 가운데 내 이름은 몇?

 

나는 원한을 산 일이 있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누군가에게 갔다

안되면 되게 한적이,

살려고 죽은적이 있다

연락하지 않았다

슬픔을 비웃었다

 

나는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다

기억하지 못했다

자백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가끔

내가 아닌 것이었다 아니,

나인 것이었다, 대체 나는 나를 상처내지 않으려고 벌벌 떨며

얼마나 여러번 잘못 찔렀단 말인가

 

나도, 아닌 인간이지만, 더러운 깨끗함 없이 사는

깨끗한 더러움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했으니

무수한 생각들을 눌러 죽인 그 생각보다 더

무수한 죄는 없을 터이고, 쥐새끼처럼

죽은 채로 살길을 찾아 헤맸던 것이니

 

죄는 알지만 용서는 모른다

용서는 알아도 벌은 모른다

알 수 없다

알아버리고 싶지 않다

나는 아픔을 오래 참을 수 있다

 

벌은 알아도 용서는 모른다

용서는 알지만 죄는 모른다

알아버리고 싶지 않다

기억나지 않는 기억의 반군들이 또 사방에서

몰려온다

 

나에게도 오래된 살생부가 있다

거기엔 언제나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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