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명자나무 / 장석주

다연바람숲 2013. 2. 27. 12:48

 

 

 

명자나무 / 장석주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동정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만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
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
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
녁마다 술집들을 순례하지 말 것.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른 과일
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열반이다.
너도 우니?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인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시집 『절벽』(세계사,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