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박정대 시인의 음악을 듣는 밤

다연바람숲 2011. 8. 22. 22:24

오랜만에 음악다방이란 곳을 갔어요.

차를 주문하면서 테이블에 주어지는 신청곡 용지와 모나미 볼펜 한자루,

문득 세월이 삼십년 전쯤으로 되돌려지는 것만 같았지요.

 

삼십년 전의 나라면 Led Zeppelin의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나 Elvis의 My Boy를 신청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추억을 되돌리는 것조차 막연하고 어색해지는 나이... 동행하신 분들이 듣고싶어하는 곡들만 신청해서 들었지요.

그래서 오늘은 유난히 시를 음악처럼 쓰는 시인, 박정대 시인의 음악들 몇 편 골라봤어요. 

 

 

 

 

취생몽사 - 박정대

바람이 없으니 불꽃이 고요하네
살아서는 못 가는 곳을 불꽃들이 가려 하고
있네, 나도 자꾸만 따라가려 하고 있네
꽃향기에 취한 밤, 꽃들의 음악이 비통하네
그대와 나 함께 부르려 했던 노래들이 모두
비통하네, 처음부터 음악은 없었던 것이었는데
꿈속에서 노래로 나 그대를 만나려 했네
어디에도 없는 그대, 어디에도 없는 생
취해서 살아야 한다면 꿈속에서 죽으리

 

 

 

음악들 -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 달리는 소리, 위구르,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누군가 떠나자 음악 소리가 들렸다 - 박정대

1. 失
그가 기타를 치자, 나무는 조용히 울음을 토해냈네. 상처처럼 달려 있던 잎사귀들을 모두 버린 뒤라 그 울음 속에 공허한 메아리가 없지는 않았으나, 공복의 쓰라린 위장을 움켜쥔 낮달의 창백한 미소가 또한 없지는 않았으나, 결코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는, 출가한 수도승의 머리 위에서 아무렇게나 빛나는 몇 점의 별빛처럼 그런대로 빛나는 음률을 갖추고는 있었네.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사랑이 아파서 그렇게 울고 있었는가, 텅 빈 귓속의 복도를 따라 누군가가 내처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는데, 아무런 생각도 없이, 느낌도 없이, 슬픔도 없이, 처음부터 그 울음 소리는 자신이 울음인 줄도 모르면서 음악을 닮아 있었네. 누군가의 손끝에 걸려 있는 노래가 자신인 줄도 모르면서 아픈 상처의 살점들을 음표로 툭툭 떨구어 내고 있었네. 빗방울에 부딪혀 기타 소리는 멀리 가지 못하지만, 자꾸만 아래로 흘러가지만, 그 소리의 향기는 빗방울을 뚫고 보이지 않는 영혼의 低音部를 조용히 연주하고 있네.

2. 音
누군가 떠나자, 음악 소리가 들렸네. 처음에는 그것이 떠나는 자의 발자국 소리인 줄 알았으나, 발자국 위로 사각거리며 떨어지는 흰 눈의 부드러운 속삭임인 줄 알았으나, 햇빛 한 점, 바람 한 조각 남겨 두지 않고 떠난 자의, 後景 속으로 밀려오는 것은, 경련하는 눈썹의 해변으로 밀려오는 것은, 거대한 幻의 물결이었네. 비록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떠난 것들의 길다란 그림자가 서로 부딪히며 어두워져 갈 때, 어둠의 중심으로부터 피어오르는 빛의 흔적들, 빛의 和音들. 보이지 않는 상처의 흔적들이 여적 남아서 추억의 힘으로 허공을 맴돌고 있었네. 허공에 입김을 불어, 몇 개의 電球를 환하게 밝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빚어내고 있었네. 아픈 것들만이, 뜨거운 것들만이 남아서 서로에게 스며들어 갈비뼈가 되고, 또 더러는 갈비뼈 속의 바다로 흘러가 덩그마니, 눈동자의 섬으로 돋아나고 있었네. 바람도 없는 깃발의 노래, 깃발도 없는 추억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네. 그 노래는 아름답지만, 그 노래의 끝에서 피어나는 새들은 눈부시지만, 누군가 다시 노래를 부르자, 새들은 조용히 소리를 물고 어디론가 날아오르고 있네.



산초나무에게서 듣는 음악 - 박정대

사랑은 얼마나 비열한 소통인가 네 파아란 잎과 향기를 위해 나는 날마다 한 桶의 물을 길어 나르며 울타리 밖의 햇살을 너에게 끌어다 주었건만 이파리 사이를 들여다보면 너는 어느새 은밀히 가시를 키우고 있었구나

그러나 사랑은 또한 얼마나 장렬한 소통인가 네가 너를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우는 동안에도 나는 오로지 너에게 아프게 찔리기 위해, 오로지 상처받기 위해서만 너를 사랑했으니 산초나무여, 네 몸에 돋아난 아득한 신열의 잎사귀들이여

그러니 사랑은 또한 얼마나 열렬한 고독의 음악인가

 

 

 

나는 음악처럼 떠난다 - 박정대



― 7월,

나는 거의 할 일이 없어, ……灣 바라보다

― 8월,

자, 이제는 해변으로라도 가야 한다

― 혜화灣,

테베에서 커피를 마시고, 우리는 발칸 반도의 서쪽 해안을 따라 아르타로 간다. 이 해안선의 어디쯤엔가, 자다르와 가에타, 툴롱과 말라가가 있을 것이다. 말라가에서 바라보면 지브롤터 해협 건너 오랑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랑에서 계속 해안을 따라 가다보면 세투발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비고와 히혼을 거쳐서 라로셸로 향한다. 라로셸에서 바라보는 비스케이灣의 황혼은 아름답다. 그러나 칼레로 가는 우리는 비스케이만의 아름다움에 쉽게 눈멀지 않는다. 더 아름다운 것을 보기 위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해안선을 따라 칼레를 지나 암스테르담과 오르후스와 탈린과 말뫼와 페쳉가와 아르항겔스크를 지나 카닌 반도로 간다. 카닌 반도는 춥다. 너무 추워서 아름다운 반도, 카닌 반도에서 水晶의 나무들이 산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숲의 나무들과 순결처럼 차가운 계절을 가슴 속에 품고 우리는 해안을 따라 계속해서 간다. 야말과 기단과 턱시를 지나 추코트 반도를 돌아 캄차카 반도에 다다를 무렵,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던 한 사람이 죽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지가와 빌 리가, 이레트와 마가단을 거쳐 추미칸에서 잘 생긴 어부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투구르를 지나 오랜 산책 끝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면 어느새 겨울이 끝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청진과 함흥과 원산을 거쳐 대포항에 다다를 것이다. 대포항에서 우리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하여 서울로, 혜화灣으로 달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혜화灣에서 플라타너스 잎들의 서쪽을 향해 걸으며 우리는 말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테베로 간다. (그런데 도대체 테베는 어디 있지?) 속으로 묻기도 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다.

― 센테멘탈 실업 동맹,

그러나 오랑에서 세투발에 가기 위하여 사람들은 바다호스*를 거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오랑에서 삼년을 살았다. 오랑의 집들 사이로는 거미의 입김 같은 바람이 불었던 걸로 기억한다. 가끔 알제市로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한 달간을 달려가기도 했다. 알제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을 아니다. 다만, 지중해 저 너머를 향한 우리의 그리움이 그곳에 추억을 실어다 나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가숨엔 언제나 푸른 지중해가 넘실거리고 있었고, 우리들의 귀에는 바다 갈매기의 울음 소리, 음악처럼 들려왔다. 코코넛 향기처럼 달콤했던 우리들의 청춘 시절, 우리의 청춘은 깃발처럼 나부끼며 그 바닷가에서 오래, 페스트 같은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랑에서 세투발에 가기 위하여 우리가 바다호스를 거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세투발에 갈 일이 없었으며, 더구나 바다 건너 대륙의 바다호스를 그리워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슴 속의 내륙에서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우리들의 그리움이란 센티멘탈 실업 동맹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랑에는 모든 것이 다 있었기 떄문이다. 맥주와 담배, 센티멘탈 실업 동맹, 그리고 실연과 실업과 실업수당까지도, 심지어는 센티멘탈 실업 동맹의 파트롱인 시시껄렁한 삶까지도.

말라가에서 계속 해안을 따라 가다보면 세투발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센티멘탈 쟈니, 기타를 치며 노래하네. "워∼워, 난 테베로 갈 거야." 센티멜탈 쟈니 밤새도록 별빛 아래서 목이 쉬도록 노래하네. "테베에는 어여쁜 아가씨들이 많아, 그 중에서도 제일로 이쁜 아가씨와 워 ∼, 달빛 아래서 난 사랑을 할 거야, 워∼워, 난 테베로 갈거야, 난 테베로 ……"

― 11월,

후박나무, 복숭아나무, 사과나무, 모과나무, 배나무, 감나무, 앵두나무, 목련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라일락, 주목, 향나무, 석류나무, 단풍나무의 가을이 왔다

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자 내 안의 천사가 날아가 버렸다

라사에 뜨는 아득한 초저녁 별

*테베 : 고대 그리스의 도시 이름
*, ** : '센티멘탈 실업 동맹'에서의 삽입 구절은 앞에서 인용. 이런 것을 문학적 용어로는 '반복'이라고 한다. 한국시에서는 특별한 강조의 뜻이 없을 때도 '반복'이 이루어진다. 그것을 비문학적 용어로는 '쓸데없는 반복'이라고 하며 또 다른 용어로는 '야, 너 계속 장난치면 맞는다'라고도 한다.
*라사 : 티벳 자치구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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