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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배영진의 나는 정통에 탐닉하는 모더니스트다

다연바람숲 2011. 4. 4. 21:20

나는 정통에 탐닉하는 모더니스트다
전통을 각색하는 디자이너 배영진 씨. 전통과 모더니즘이 조화롭게 만나는 지점에 그가 있다. 스스로를 모더니스트라 말하는 그는 인생의 해법을 ‘한국의 전통’에서 찾았다.


객을 앞에 두고 주인이 자신의 잔에 먼저 커피를 따르고 있다. “모카 포트로 뽑은 에스프레소는 주인 잔에 먼저 따르는 거예요. 손님에게 혹시라도 찌꺼기 섞인 커피를 대접하지 않으려는 스페인 사람들의 습관이지요.” 초면인 객의 오해를 사지 않으려는 듯 설명이 이어진다. 주인은 향이 짙은 에스프레소 한잔으로 영하의 날씨에 꽁꽁 얼어붙은 객의 마음을 풀어준다. 그는 꼬세르 Coser(스페인어로 ‘바느질’)라는 패션 브랜드를 운영하고 몬테야노 템플로 Montellano templo(스페인어로 ‘작은 언덕 위의 템플’)라 이름 붙인 집에 살고 있다. 이런 그를 이국 땅을 향한 향수와 로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으로 오해하지는 말자. 젊은 시절 잠시 머물렀던 스페인의 추억을 숨은 그림처럼 일상 속에 소소한 흔적으로 남겨놓았을 뿐 그는 ‘한국적인’ 것을 논할 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개량 한복과 바람의 옷 디자이너 배영진 씨. 그를 가장 쉽고 빠르게 소개하는 길은 아마도 드라마 <궁>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퓨전 사극 <궁>을 통해 주지훈과 윤은혜 못지않은 스타로 등극한 것이 바로 그의 한복이니 말이다. 전통 한복의 아름다움과 퓨전 한복의 가능성을 함께 보여준 드라마 속 의상은 모두 디자이너 배영진 씨의 작품이다. 위니아 딤채의 딤채아트워크, 현대 힐스테이트 모델하우스 스타일링, 더페이스샵의 화장품 패키지 디자인 등 현재는 패션을 넘어 ‘한국적인 것’을 모던하게 풀어낼 수 있다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그를 알고자 한다면 배영진표 한복을 먼저 알아야 한다.
1990년대 초반 인사동 거리에서는 개량 한복이라는 옷이 유행하고 있었다. 일명 운동권 패션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 옷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한 외신은 ‘바람의 옷’이라 표현하기도 했던 한복. 외국인에게는 이토록 아름다운 문구를 떠올리게 하는 곱디고운 한복에 ‘개량’이라니! 더욱이 개량이라 함은 개선되고 더 나아졌다는 뜻인데, 무엇이 좋아졌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옷은 아름답지 않았다. 행여 외국인들이 이 옷을 한국의 옷이라 단정 지을까 두렵기까지 했다. 그저 취향에 안 맞은 옷이니 안 입으면 그만인 것으로 치부해버리지 못하고 그리도 마음이 불편했던 것을 보면 한복은 그에게 어떤 운명이었나 보다. 우연한 기회에 들렀던 통인가게의 작은 전시회에서 발견한, 색동이 아닌 흰색 명주로 지은 돌복에서 그는 한복이 펼칠 수 있는 아름다운 변주를 보았다. 그 길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구혜자 선생에게 한복을 배우고 천연 염색을 공부하면서 ‘배영진식 해석이 가미된’ 한복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배영진 씨가 세상에 첫 번째로 선보인 옷은 한복과 양장을 절묘하게 조합한 것이었다. 한복 저고리 선을 살린 흰색 명주 누빔 재킷과 검정 치마. 한복이기도 하고 양장이기도 한 이 옷을 설을 앞두고 탤런트 고두심 씨와 박물관 학예 연구원이었던 친구에게 선물했다. 고두심 씨는 설 특집 TV 프로그램에 이 옷을 입고 출연했고, 다른 출연자들이 모두 오색찬란한 한복으로 치장한 덕에 오히려 그의 옷이 품어내는 단아한 매력이 두드러질 수 있었다. 친구 또한 박물관 신년 행사에 배영진 씨가 디자인한 그 옷을 입고 간 덕에 문화계 인사들과 외국인들에게도 그의 옷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 배영진 씨는 퓨전 한복뿐 아니라 전통 한복도 디자인한다. 손누비로 장식한 아기 버선은 돌차림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2 고운 빛깔의 한복을 입은 테디베어 가족이 경복궁을 바라보는 뒷모습이 재미나다. 꼬세르 매장에서 발견한 풍경.



3 그의 사무실에는 앤티크 자수로 만든 액자와 병풍, 미술 작품이 가득하다.
4 가회동 꼬세르 매장 3층에 있는 제작실에서 배영진 씨와 조금덕 씨. 조금덕 씨는 꼬세르 오픈부터 배영진 씨와 함께 일해오고 있다.


위층 아내, 아래층 남편 지난해 여름 배영진 씨와 그의 남편(조각가 배삼식 씨)은 녹번동 산기슭에 아담한 집을 지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 야트막한 언덕을 만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니 겉으로는 작은 창 하나 보이지 않는, 그 속을 가늠할 수 없는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외벽에 새겨진 ‘Montellano templo’라는 문구가 궁금증을 더한다. 현관에 들어서자 바로 계단이 시작된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 옥상 데크에 다다르니 탄성이 절로 새어 나온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을 바라보니, 그는 무슨 재주로 숨겨진 보물 같은 이 집터를 찾아냈을까 싶다. “배 선생님(그는 남편 배삼식 씨를 이렇게 부른다)이 찾아냈어요. 매일 평창동 작업실과 광화문에 있는 집을 오가다 이 동네가 눈에 들어왔나 봐요. 처음에 이 터에 집을 짓겠다고 했을 때 엄청 반대했지요.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은 서른 평 남짓한 땅에 집을 짓겠다는데 도대체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 거예요.” 남다른 안목을 가진 남편과 사는 덕에 누리게 되는 호사라며 이야기한다.
부부는 대학 동기 캠퍼스 커플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부부 모두 예술가의 길을 가기에는 아이들 키우고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에 걸림돌이 많았다. 배영진 씨는 남편이 먼저 작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했다. 남편의 유학으로 3년을 보냈던 스페인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돌아와 인사동에 작은 구두 가게를 열었다. 아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배삼식 씨는 일찍이 작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배영진 씨 또한 남편의 배려와 격려 속에 작가적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패션 디자인 분야를 개척하며 비즈니스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집은 3층을 가운데 두고 위아래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조각가 남편의 공간인 1・2층과 디자이너 아내의 공간인 4・5층의 중심인 3층은 부부 공동의 공간. 상하 대칭을 이루는 공간의 균형이 서로를 격려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부부의 모습과 꼭 닮았다.


5 그는 한복의 전통 색을 가미해 만찬이 아닌 칵테일 파티나 댄스 파티 같은 캐주얼한 모임에서도 입을 수 있는 한국의 옷을 디자인한다.


6 거실과 부엌이 있는 3층 입구 전경. 전통 창살 문양으로 장식한 금속 문은 그의 남편인 조각가 배삼식 씨의 작품이다. 전면에 보이는 그림은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한순자 씨 작품.
7 이탈리아 스타일의 모던한 가구와 소반, 옹기 수반이 조화를 이루는 거실 풍경. 플라워 패턴이 멋스러운 쿠션은 꼬세르 제품이다.


꼬세르를 닮은 몬테야노 템플로 위층과 아래층에 각자 독립된 공간을 갖고 있는 부부가 만나는 3층은 거실과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집의 구조가 거실 중심이라면 이곳은 부엌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웅장하게 자리 잡은 ㄷ자형 아일랜드 조리대 뒤로 자개 나비 문양의 빌트인 냉장 시스템이 병풍을 펼친 듯 멋스럽다. 그가 딤채아트워크에 참여해 작업한 것이다. 한쪽 벽 전체를 장식한 창호지 문이 은은한 멋을 더한다. 구석구석 찬찬히 들여다보노라니 이 집은 그의 옷과도 닮았다. 한복과 양복을 적절하게 조합하듯, 현대 건축에 한옥의 요소를 멋스럽게 녹여냈다. 그의 서재이자 침실인 4층에는 또 하나의 집이 숨어 있다. 계단을 올라 4층으로 들어서면 긴 복도를 만나게 되는데, 벽이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들면 침실 공간이다. 고재로 기둥을 세우고 반닫이 하나 들이니 침실은 영락없는 한옥이다. 침대 머리맡 미닫이문을 여니 장판지가 노릇하게 익어가며 콩기름 내를 솔솔 풍기는 온돌방이 나온다. 선비 책상과 이불 한 채, 벽에 걸린 민화 한 점이 운치를 더하는 공간이다.


1 디자이너 배영진 씨.
2 꼬세르 브랜드로 가방을 선보일 예정인 그는 집에도 가방을 디스플레이 해놓고 자꾸 들어보고 거울에 비춰 보면서 디자인을 검토한다.



3 4층에서 5층까지 뚤린 천장 아래로 커다란 달항아리가 멋스럽다. 책상 앞 창 밖으로 북한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4 서재와 침실이 하나인 공간에서 붙박이 책장 옆에 설치한 고재 기둥이 공간을 구분 짓는 장치가 된다. 서재와 달리 침실은 한옥의 정취를 담고 있다. 안쪽의 작은 방은 콩기름 먹인 장판지를 바르고 한실로 꾸몄다.


배영진 씨는 뒤뜰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새봄이 오고 수풀이 우거지는 여름이 오면 펼쳐질 정원의 모습을 묘사한다. 집터라야 겨우 30평 남짓하니 뜰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바로 뒷산과 이어지는 터라 뒷산이 곧 이 집의 뜰과 다름없어 보인다. 이제 김장독을 묻을 수 있게 된 덕에 김장으로 일곱 가지 김치를 담갔다는 자랑도 잊지 않는다. 내친김에 함께 점심을 들자 청한다. 친정어머니에게서 배운 과일김치, 동치미, 장김치, 배추김치…. 푸짐한 김치 보시기가 상을 채운다. 처음 보는 과일김치에 대해 물으니 “친정어머니가 창작한 거예요.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보쌈김치라고나 할까요? 어머니의 과일김치를 보면 꼭 제 옷을 보는 것 같아요.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맛, 실용적으로 즐길 수 있는 특별한 멋, 닮은 구석이 있어요.”

나는 한복이 안 어울려 “출발은 단순했어요. 한복은 정말 아름다운 옷인데 일상적인 옷이 될 수 없다는 것, 만찬에는 입고 갈 수 있으나 칵테일 파티나 댄스 파티에는 입고 갈 수 없다는 것….” 젊은이들뿐 아니라 외국인도 편하고 아름답게 입을 수 있는 ‘한국의 옷’을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디자인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지만, 어려움은 제작 과정에서 찾아왔다. 꼬세르 오픈을 준비하던 시절만 해도 패션 업계에 인맥이 전무했다. 패턴사나 재봉사 등 그의 디자인을 실제 옷으로 구현해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솜씨 좋은 기술자를 만나도 한복의 요소와 양복의 요소를 조합한 디자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행운은 사람을 잘 만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일까? 운 좋게도 그는 자신 못지않게 새로운 작업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한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제가 싫어하는 말이 ‘나는 한복이 안 어울려’예요. 한국 사람한테 한복이 안 어울리면 누구한테 어울리나요? 우리는 근거 없이 우리 것을 부정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어요. 외국에서 먼저 인정하고 대접해주면 그제야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가하곤 해요.” 꼬세르 초창기 시절, 유난히 외국인 고객이 많았던 걸 보면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20평 남짓 자그마한 인사동 옷집 꼬세르와 디자이너 배영진 씨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일화가 있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한 때 영국 대사관 측에서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옷집으로 꼬세르를 선정했던 것. 분 단위로 일정이 짜여 있는 와중에 여왕은 꼬세르 한복에 매료되어 한참을 머문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5 요리를 즐기는 남편 배삼식 씨는 손님을 초대하는 날이면 언제나 특별한 요리를 준비한다.

이세이 미야케, 상하이 탕, 그리고 꼬세르 녹번동에서 출발해 부암동 고개를 넘고 청와대 앞을 지나, 경복궁 담을 끼고 가회동 꼬세르 매장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서울의 아름다운 자연과 유서 깊은 문화가 모두 담겨 있다. 구 도심의 낭만과 정취가 살아 있는 이 길을 조석으로 마주하는 그가 어찌 서울을, 6백 년 고도의 흔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한국적인 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제 디자인의 존재 이유지요. 지금까지 모티프나 시각적 이미지 차용과 변형을 통해 전통을 표현해오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국적인 정신과 정서를 표현해내고 싶어요. 예를 들면 전통적인 모티프나 이미지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왠지 모르게 우리의 정서가 느껴지는 모던한 디자인이요. 갈 길이 멀지만 부단히 노력해야죠.”
그는 얼마 전 동대문 쇼핑몰에 들렀다. 드라마 <궁>이 종영된 지 3년이 지났건만, 빨간색 미니 고름이 앙증맞은 흰 저고리와 다홍치마의 일명 ‘채경이옷’을 카피한 제품은 여전히 일본, 중국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인기 상품이라 하니, 내 디자인을 카피해 누군가 득을 취하는 것에 화가 나기보다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더란다. 모 의류 회사가 그의 디자인을 카피해 중국에 2만 장이나 팔았다는 소문도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 한복을 접해볼 기회가 없었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한복을 ‘갖고 싶고 입고 싶은’ 옷으로 인식하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분주하다. 곧 꼬세르 브랜드를 단 가방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가방은 옷에 비해 사이즈나 체형의 구애를 덜 받지요. 한국 디자인을 외국인들에게 소개하기에는 옷보다 효과적일 수 있겠다 싶어요.” 사무라이 복장을 모티프로 출발한 일본의 이세이 미야케와 치파오에서 변주된 중국의 상하이 탕처럼, 그는 꼬세르가 세계인이 보편적으로 즐길 수 있는 한국의 패션 브랜드로 성장하는 날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