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인기척 / 이병률

다연바람숲 2010. 11. 21. 20:08

 

 

 

 

 

 

 

인기척 / 이병률

 

 



한 오만 년쯤 걸어 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다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 온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 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 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 슬쩍 건드려 온다면 어쩔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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