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기형도를 읽는 밤

다연바람숲 2010. 11. 15. 20:49

 

 

가을에 / 기형도

잎 진 빈 가지에
이제는 무엇이 매달려 있나.
밤이면 幽靈처럼
벌레 소리여.
네가 내 슬픔을 대신 울어줄까.
내 音聲을 만들어 줄까.
잠들지 못해 여윈 이 가슴엔
밤새 네 울음 소리에 할퀴운 자국.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
잎 진 빈 가지에
내가 매달려 울어볼까.
찬바람에 떨어지고
땅에 부딪혀 부서질지라도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에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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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그대쪽으로 /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簿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워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빈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겨울 - 우리들의 도시 / 기형도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풀리지 않으리란 것을, 설사
풀어도 이제는 쓸모 없다는 것을
무섭게 깨닫고 있었다. 나는
외투 깊숙이 의문 부호 몇 개를 구겨넣고
바람의 철망을 찢으며 걸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이 世上에서 애초부터
우리가 빼앗을 것은 無形의 바람뿐이었다.
불빛 가득 찬 황량한 都市에서 우리의 삶이
한결같이 주린 얼굴로 서로 만나는 世上
오, 서러운 모습으로 감히 누가 확연히 일어설 수 있는가.
나는 밤 깊어 얼어붙는 都市앞에 서서
버릴 것 없이 부끄러웠다.
잠을 뿌리치며 일어선 빌딩의 환한 角에 꺾이며
몇 타래 눈발이 쏟아져 길을 막던 밤,
누구도 삶 가운데 理解의 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숨어 있는 것 하나 없는 어둠 발뿌리에
몸부림치며 빛을 뿌려넣은 수천의 헤드라이트!
그 날[刃]에 찍히며 나 또한 한 점 어둠이 되어
익숙한 자세로 쓰러질 뿐이다.
그래, 그렇게 쓰러지는 法을 배우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온몸에 시퍼런 절망의 채찍을 퍼붓던 겨울 속에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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