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끝 / 김충규
실연하고 돌아오는 저녁 길은
무화과 잎처럼 딱딱해져 버린 입을 다물었습니다
무수한 애원과 변명에도 당신은 기어이
내게 뒷모습을 보였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뒷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사랑이 끝이라는 증거임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가시밭 지나오지 않았는데도
내 몸에는 가시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습니다
당신의 내면은 장편소설보다도 두꺼워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내게는 잘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눈빛을 떨며 한 장 한 장
당신의 생애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나갔습니다
내가 읽어낸 페이지가 깊어질수록
조금은 당신을 알 수 있을 듯 했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에는 당신이
손수 붉은 잉크로 밑줄을 그어 놓았지요
그 붉은 잉크가 당신의 따뜻한 피인 줄
내가 왜 모르겠어요 아아,
어느 페이지에선가 백지가 나왔을 때
난 혹여 인쇄가 잘못된 것인가 싶었습니다만
거기까지가 내가 읽을 수 있는 당신의 생애였습니다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당신의 단호함이
내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백지만 나오게 했습니다
무화과 잎을 따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무화과 그늘 아래서 시작된 우리 사랑이
서로에게 지워지지 않는
그늘을 만들 줄 차마 알지 못했습니다
이 그늘이 내 생의 얼룩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며
나는 파르르 몸을 떨었습니다
당신은 떠나고
나는 무화과나무 속으로 들어가
영영 꽃피지 않고 남은 세월을 견뎌내렵니다
'창너머 풍경 > 열정 - 끌리는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뿌리와 가지 / 안오일 (0) | 2010.09.02 |
---|---|
편지 / 심보선 (0) | 2010.08.27 |
명자나무 / 장석주 (0) | 2010.08.19 |
연애의 횟수 / 김경미 (0) | 2010.08.15 |
진실, 반어적反語的 진실 / 유안진 (0) | 2010.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