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연애의 횟수 / 김경미

다연바람숲 2010. 8. 15. 14:42

 

 

 

 

 

 

연애의 횟수 / 김경미

 


그 나라 입국할 때는 써넣어야 된다 합니다
그러니까


밤의 횟수를


식초를 식초에 타서 마신 밤 알코올을 촛불에 태워 마신 밤
눈썹의 검은 눈물자국 베개를 지나 귀로 흘러든 밤


非常時 문을 여세요, 쓰인 비행기 비상문을

아이가 열 뻔했다는 밤 모르는 한자 때문에
하늘에서 비행기 문 열릴 뻔한 비상시의 밤
더는 읽을 수 없는 해독불가의 그대라는 실종의 밤
음식 버리면 죽어서 다 먹어야 한다는데 곧 심장 멎으리
그때 굶지 않도록 음식들 미리 버려둔 밤


버렸는데도 마구 체해 얼굴 노래진 밤 손톱으로
바늘을 따는 밤 피가 없어 솟구치지 않는 밤


버지니아 울프가 길에서 만난 친구 딸에게 물었다는 밤
너 나랑 두꺼운 지우개 사러 갈래? 그동안 쓴 소설들 다 지우게
울프 주머니에 돌멩이 넣고 강으로 데려가고
보름달 같은 국산지우개 내주면서 미칠 테면 미치라는 밤
그러니까


이별의 횟수,


그 예술의 순간으로써
저마다 모양과 부피 다른 지도를 나눠주는 게
그 나라 출국하는 방식이라 합니다


 

시인 김경미
 
1959년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이기
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쉿, 나의 세컨드는』『고통을 달래는 순서』 등이 있다. 
 
 
시작 노트
 
 "사랑이 아니라 이별이 예술이다."
 
사랑이 아니라 이별이 예술이다. 오래 살다 보면 별 걸 다 알 수 있다. 물론 오래 안 살아도 빨리 알 수도 있긴 하다
 

 

 

현대문학 <시, 사랑에 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