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나가자.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한국최초의 여류 화가이자 발군의 필력을 가진 문필가인 나혜석은 오늘날까지도 여성해방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신화적 존재가 되어 있다. 근대문학 태동기인 1914년 ‘이상적 부인’에 관한 논설을 발표하여 전 유학생 문단과 지식인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그녀는 일생을 통하여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나혜석이 당대 어느 여성보다 대중적 관심을 모은 배경에는 화가로서의 뚜렷한 업적과 논객ᆞ문학가로서의 활동 못지않게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혜석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다양한 양식의 산문들이다. 산문 55편, 시
3편, 희곡 1편, 소설 4편의 숫자가 말해주듯, 나혜석은 본격적인 문학가라기보다 논객이라 불리는 편이 타당할 정도이다. 때문에 산문을 배제한
채 나혜석 소설의 연구만으로는 그녀의 작가적인 전모를 이해할 수 없다. 나혜석의 소설과 산문은 그녀의 삶의 굴곡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결혼 전, 결혼 시기, 구미 여행 후의 이혼기의 세 시기가 그것이다.
첫째 시기는 각각 여권의식과 애국심 고취를 주제로 하는 소설
「경희」와 「회생한 손녀에게」가 발표된 1910년대이다.
1896년 수원의 갑부집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와 오빠 나경석의 적극적인 권유에 힘입어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고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가 된다. 유학시절에는 같은 유학생이던 오빠 나경석의 보호와 후원 아래 춘원, 염상섭 등과
교유를 맺는다. 특히 춘원과 함께 문단의 쌍벽을 이루던 천재시인 최승구와는 장래를 약속한 애인 사이였다. 그러나 1917년 애인 최승구가
폐병으로 요절한 후, 한동안 비탄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나혜석은 산문을 통하여 학식, 여권 등 다소 추상적인 주제를 부각시킨다.
현모양처의 부덕이라는 것은 가부장제의 노예만들기라고 간파하면서 학식을 통한 실력배양으로 여권을
획득하자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그녀가 의식한 청중은 이미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층이었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볼 수 있는 이 시기의 소설 「경희」도 이러한 주장을 소설화한 것이다. 소설은 동경 유학중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온 여주인공 경희가 주위의 여러 가부장제적 사고방식의 인물들과 부딪치며 갈등하나, 모범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으로 신여성에 대한 편견을 하나씩 깨뜨리고,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여성교육의 당위성을 깨닫게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가정에서 축출당하고 자녀의 면접권도 거부당하게 된다. 남편 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고 해서 자식에 대한 애정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후 박탈당한 모성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사회의 냉대가 더욱 심해지고 모성조차도 박탈당한 후, 그녀의 수필은 후회와 비애의 심정, 허무감으로 윤색되고, 「이혼고백서」의 당당했던 주장도 변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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