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감성 - 통하는문

나혜석(羅蕙錫) - 시대를 앞서 간 여성의 몰락

다연바람숲 2006. 4. 12. 13:37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나가자.

                     
   
 


나혜석 ( 1896∼1948 )
 
                       四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 1935년 나혜석
 
 
 

한국최초의 여류 화가이자 발군의 필력을 가진 문필가인 나혜석은 오늘날까지도 여성해방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신화적 존재가 되어 있다. 근대문학 태동기인 1914년 ‘이상적 부인’에 관한 논설을 발표하여 전 유학생 문단과 지식인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그녀는 일생을 통하여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나혜석이 당대 어느 여성보다 대중적 관심을 모은 배경에는 화가로서의 뚜렷한 업적과 논객ᆞ문학가로서의 활동 못지않게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혜석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다양한 양식의 산문들이다. 산문 55편, 시 3편, 희곡 1편, 소설 4편의 숫자가 말해주듯, 나혜석은 본격적인 문학가라기보다 논객이라 불리는 편이 타당할 정도이다. 때문에 산문을 배제한 채 나혜석 소설의 연구만으로는 그녀의 작가적인 전모를 이해할 수 없다. 나혜석의 소설과 산문은 그녀의 삶의 굴곡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결혼 전, 결혼 시기, 구미 여행 후의 이혼기의 세 시기가 그것이다.

 

 

첫째 시기는 각각 여권의식과 애국심 고취를 주제로 하는 소설 「경희」와 「회생한 손녀에게」가 발표된 1910년대이다.

 

1896년 수원의 갑부집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와 오빠 나경석의 적극적인 권유에 힘입어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고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가 된다. 유학시절에는 같은 유학생이던 오빠 나경석의 보호와 후원 아래 춘원, 염상섭 등과 교유를 맺는다. 특히 춘원과 함께 문단의 쌍벽을 이루던 천재시인 최승구와는 장래를 약속한 애인 사이였다. 그러나 1917년 애인 최승구가 폐병으로 요절한 후, 한동안 비탄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나혜석은 산문을 통하여 학식, 여권 등 다소 추상적인 주제를 부각시킨다. 현모양처의 부덕이라는 것은 가부장제의 노예만들기라고 간파하면서 학식을 통한 실력배양으로 여권을 획득하자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그녀가 의식한 청중은 이미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층이었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볼 수 있는 이 시기의 소설 「경희」도 이러한 주장을 소설화한 것이다. 소설은 동경 유학중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온 여주인공 경희가 주위의 여러 가부장제적 사고방식의 인물들과 부딪치며 갈등하나, 모범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으로 신여성에 대한 편견을 하나씩 깨뜨리고,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여성교육의 당위성을 깨닫게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둘째 시기는 가정적 안정기인 1920년대이다.
 
변호사인 김우영의 열렬한 구애를 받고 1920년에 결혼한 나혜석은 이듬해 남편의 후원 아래 한국 화단에서는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신문에 대서특필된다. 남편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임명된 후, 1927년에는 일본 제국에서 은급으로 하사한 구미 시찰길에 오르면서 1년 8개월 동안 유럽 각국과 미국ᆞ하와이ᆞ일본을 여행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은 이혼 후인 1930년대에 기행담과 회고적 수필 형식으로 기술된다. 이 시기의 나혜석의 산문은 부르주아적 계층의식을 뚜렷이 드러낸다.
 
「부인 의복 개량 문제」「나를 잊지 않는 행복」「부부간의 문답」 등의 산문에서 나혜석은 여성의 억압과 빈곤이라는 당대 여성들에게 보편적이던 이중의 질곡을 전혀 느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 당시 ‘일생동안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 주시오’ 등의 나혜석의 조건을 무조건 허락하였으며, 신혼여행길에는 그녀의 죽은 애인의 무덤에 들러 묘비까지 해 주었을 정도로 그녀에 대한 애정이 극진하였다. 그런 남편의 애정과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 있던 나혜석에게 당대 여성들의 고통은 전혀 실감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다만 구미 여행에서 피상적으로 본 서구적 가정 수준의 남녀평등을 주장했던 것이다.
 
 
 세 번째 시기에는 소설 「현숙」과 40여편의 산문들이 발표되는데, 주로 과거회상의 감상문이나 쓸쓸한 심경의 신변수필, 구미여행담이 주를 이룬다.
 
1927년 구미여행길에 올라 1929년 귀국한 나혜석은 파리에서 있었던 최린과의 밀회사실이 밝혀지면서 남편 김우영에게 이혼당하게 된다. 이혼 후 3년만인 1934년 「이혼고백서」를 『삼천리』에 발표하고, 이어서 『동아일보』 에 「최린을 상대로 한 제소장」이 공개되면서 나혜석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화제의 중심에 있게 된다. 그녀는 「이혼고백서」에서 최린과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고백하면서, 그러나 결혼은 생활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자신의 생활을 편안하게 해 주는 김우영과의 결혼생활을 영위하겠다고 하였다.
 
외도는 하되 가정은 지킨다는 것은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주장은 당시의 일반적인 남녀의 관계를 완전히 역전시킨 것이었다. 다른 남자나 여자와 잘 지내면 오히려 기분전환이 되어 부부간의 관계가 더 좋아질 수 있으며, 그것은 죄나 실수가 아니라 진보된 사람에게 있는 감정이라고 하는 그녀의 주장은 근대 가족제도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정에서 축출당하고 자녀의 면접권도 거부당하게 된다. 남편 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고 해서 자식에 대한 애정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후 박탈당한 모성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사회의 냉대가 더욱 심해지고 모성조차도 박탈당한 후, 그녀의 수필은 후회와 비애의 심정, 허무감으로 윤색되고, 「이혼고백서」의 당당했던 주장도 변화하게 된다.
 
너무나 시대를 앞서 갔던 그녀의 주장은 가부장제적인 당대의 보편적인 시각에 의해 교정당하게 된 것이다. 당당한 주장과 자기고백적인 글을 꾸준히 발표해 오던 나혜석은 사회의 냉대와 박탈당한 모성, 그리고 스스로의 영락의식으로 고통을 받다가 1938년 이후 문필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후 정신질환에 반신불수가 겹친 상태에서 양로원, 보육원을 전전하다가 1946년 무연고자 병동에서 숨을 거둔다.
 
근대 초기에 다른 어느 여성들보다도 좋은 환경에서, 남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 살았던 나혜석은 누구보다도 자신만만하고 당당할 수 있었다. 그녀의 주장은 요즈음의 사고방식으로 봐도 놀라운 면이 있다. 너무도 좋은 환경에서, 비바람에 한번도 시달려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혜석은 그렇게 이상주의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 갔던 여성은 결국 모진 징벌을 받게 되고, 생애 전반기의 화려함 만큼이나 비참한 영락 끝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참고문헌; 이호숙 “위악적 자기 방어기제로서의 에로티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