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올랭피아 Olympia>
1862년, 마네는 자신의 독특한 회화방법을 발견했으며, 그 한 해에만도 열서너 점의 크고 작은 대표작들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살롱에서 여러 점이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그해 살롱에서 탈락한 작품의 수는 4천 점이 넘었으며 낙선한 예술가들 가운데는 폴 세잔, 제임스 애봇 맥닐 휘슬러, 카미유 피사로, 팡탱-라투르, 용킨트 등도 있었습니다.
마네의 <올랭피아 Olympia>, 1863, 유화, 130.5-190cm.
이 작품은 <풀밭에서의 오찬>보다 먼저 구상한 작품입니다. 별로 아름답지 못한 여인을 마네는 태연한 포즈의 누드로 묘사하면서 발아래에 검은 고양이를 두어 눈이 번쩍이게 했습니다. 누드의 여인은 매춘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만했습니다. 검은 고양이는 죄와 타락의 상징합니다. 흑인 여자가 배달한 꽃을 들고 와 함께 포즈를 취했습니다. 꽃다발은 숭배자를 상징합니다. 이 작품이 물의를 일으킨 건 인체를 평면적으로 처리하고 기교와 구성을 등한시 한 채 파리의 밤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검은 고양이는 한동안 파리 화단에 논란거리였습니다. 한때 마네를 옹호했던 테오필 고티에는 “침대 위에 더러운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 고양이로 인해 그림이 추잡해졌다고 혹평했습니다.
이 작품은 작품 가격이 오른 마네 사후에도 1만 프랑(12,250유로)을 내고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이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 인상주의 미술품 중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1488-90년경-1576)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The Venus of Urbino>, 1538년경, 유화, 119-165cm.
성시르네상스에 활약한 티치아노는 1533년에 로마 황제 카를 5세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고 궁정 화가에 임명되었습니다. 1545년에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초청을 받고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1576년 타계했을 때 그는 베네치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화가로 알려졌습니다. 그가 제작한 작품은 646점으로 알려졌습니다. 그의 작품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색채주의입니다.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에 소장되어 있는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하얀 융단 위에 누드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있고 여인의 발끝에는 개가 웅크린 채 자고 있습니다. 두 명의 하녀가 화면 오른편에 있는데, 무릎을 꿇은 하녀는 옷장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모습입니다. 누드 여인은 신화 속의 비너스가 아니라 베네치아의 귀족으로 몸치장을 하려고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당시 화가들이 신화의 여성을 그리기 보통이었는데 티치아노는 일반 여인에서 여성이 이상미를 찾았습니다. 이 작품은 우르비노의 구이도바르도 델라 로베레가 주문한 것이며, 그가 타계한 후 1631년 델라 로베레의 유산과 함께 피렌체의 메디치가에서 보관했다가 1736년부터 우피치 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1780-1867)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La Grande Odalisque>, 1814, 유화, 91-163cm.
앵그르는 19세기 프랑스 신고전주의를 대표한 화가입니다. 로마에서 회화를 공부하면서 한때 라파엘로에 심취했던 그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양식을 대표하는 낭만주의에 맞서 아카데미의 정통성을 옹호했습니다. 역사화에서 니콜라 푸생과 자크 루이 다비드의 양식을 따랐으나 말년에 그린 초상화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오달리스크는 터키 황제의 시중을 들던 여자노예를 말합니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동방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흥미로운 건 앵그르 자신은 터키를 방문한 적이 없지만, 터키 문화를 테마로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풀밭에서의 오찬>을 그린 지 몇 달 만에 마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대작이라고 할 만한 그림을 그렸는데 바로 <올랭피아 Olympia>입니다. 이 작품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에 그린 것입니다. 이 작품이 1865년 살롱에 선보이자 사람들은 이 작품을 “고양이와 함께 한 비너스”라고 불렀습니다.
<올랭피아>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로부터 아이디어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네는 1856년 이탈리아를 두 번째 여행했을 때 우피치 미술관에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사했습니다. 그는 티치아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여신을 상징하는 비너스 대신 벌거벗은 모델을 침대에 누이고 옆에 흑인 하녀를 세웠습니다. 모델은 그가 선호한 빅토린이었으며 올랭피아라는 이름은 당시 프랑스 화류계에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풀밭에서의 오찬>보다 작지만 모델을 실물 크기로 그린 것입니다.
올랭피아란 이름의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올랭피아 말다치니 팜필리가 있는데 마네가 그림을 그릴 때 특별히 이 여인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교황 인노체시오 10세Pope Innocent X 동생의 미망인이었던 이 여인은 인노체시오 10세의 애인이 되어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바로크 회화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Die해 Rodriguez de Silava Velázquez(1599-1660)가 1650년 로마에 머물 때 인노체시오 10세의 요청으로 그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데 이 여인의 초상도 그렸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를 보면 인노체시오 10세는 눈매가 날카로우며 단호한 표정입니다. 마네는 그 초상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교황과 올랭피아의 관계는 오늘날보다 훨씬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올랭피아>에는 프라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 Naked Maja>(1799-1800년경) 그리고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노예와 함께 있는 오달리스크 Odalisque with Slave>(1842)의 요소도 혼용되어 있습니다. 에드가 드가가 말한 대로 마네는 다양한 데서 영감을 얻었고 그 요소들을 자신의 구성요소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특기할 점은 마네의 필치가 전통주의 기법에 비해 훨씬 잔잔하면서도 대담하다는 것입니다. 모델에 대한 그의 의도적인 표현도 적중했으며, 평론가 귀스타브 제프루아Gustav Geffroy가 마네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간파했습니다.
"역마살이 낀 자유분방한 여인으로, 마네가 하룻밤 풋사랑을 나눈 술집의 바람기 있는 여인이다. … 여인의 눈빛은 신비롭고 얼굴은 매정한 어린이 같다."
마네는 빅토린의 발끝에 보일 듯 말 듯 검은 고양이를 묘사했는데 에로틱한 분위기가 고양이로 인해 한껏 고조되었습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의 잠든 개를 고양이로 대체시킨 것입니다. 고양이는 프랑스어로 여자의 음부를 뜻합니다. 어쩌면 보들레르의 “왕비의 발밑에서 발기하고 있는 고양이처럼”이란 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올랭피아>는 평론가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는데 테오필 고티에는 악평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봐준다고 해도 <올랭피아>는 침대 위에 누운 가냘픈 모델의 모습이 아니다. 색조가 더럽기 그지없다. … 반쯤 차지한 음영은 구두약을 칠한 것 같다. 추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이런저런 색의 조합으로 인해 매우 추하게 보인다. … 정말이지 그림 속에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든 주목을 받아보려고 애쓴 흔적밖에는.”
1865년 이 그림에 대한 혹평이 극에 달했을 때 마네는 시인 보들레르의 위로를 받고 싶어 브뤼셀에 있는 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보들레르 씨, 당신이 여기에 계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를 향한 비난이 빗발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 저는 제 작품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보들레르는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다시 자네에게 말하지. 자네가 훌륭한 화가임을 내 입으로 선언하네. 자네에 대한 갖가지 추문은 모두 우스운 이야기들일세. 사람들이 자네를 조롱한다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군. 요컨대 사람들이 자네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지. 흔한 일일세. 자네가 명심해야 할 점은 이런 경우를 자네가 처음 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일세. 자네가 자신을 샤토브리앙 혹은 바그너보다 더욱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도 한때 자네처럼 조롱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라네. 그들이 사람들의 조롱을 견디지 못해 죽었나? 그렇지 않네. 자네가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할까봐 하는 말인데, 샤토브리앙과 바그너는 자네보다 위대했으며, 자기 분야에서 최고였고, 그들의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나빴다네. 자네는 ‘낡은 시대의 최고’일 뿐이라네. 이렇게 허물없이 말하는 것을 용서하게. 내가 자네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줄 아네.”
<올랭피아>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는데 왜 마네가 그것을 살롱에 출품했을까요? 그가 이 작품을 2년 동안 화실에 둔 것으로 미루어 살롱에 출품하는 데 망설였던 것 같습니다. 마네의 장남 레옹은 보들레르가 출품을 권했다고 하고, 차남 자크 에밀 블랑슈는 수잔이 출품하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술회했습니다. 하지만 1865년 당시 블랑슈는 겨우 네 살이었으므로 그의 말을 믿기 힘든 데다 성격상 수잔은 마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므로 보들레르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마네는 <올랭피아>가 살롱에 받아들여졌다는 기쁜 소식을 보들레르에게 알렸습니다.
도덕주의자로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였던 에밀 졸라Emile-Edouard-Charles-Antoine Zola(1840-1902)가 마네의 솔직함을 높이 평가한 이후 <올랭피아>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 시작했다. 졸라는 1867년 『새로운 회화의 기법』에서 마네가 “파리 시민을 그들 시대의 한 여인에게 소개했다”면서 적었습니다.
“마네는 1865년 <군인들에게 조롱당하는 예수 Jesus Mocked by the Soldiers>와 걸작 <올랭피아>를 살롱에 출품했다. 나는 감히 <올랭피아>를 걸작이라 말하며 이 말에 책임을 질 것이다. <올랭피아>는 화가 자신의 피와 살이다. 다시는 이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 속에 그의 모든 천품을 쏟아 넣었으니까. …
파리한 빛으로 묘사된 몸뚱어리는 소녀처럼 매력적이다. 마네는 열여섯 살짜리 모델의 몸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외쳤다. 저 음흉한 몸뚱어리를 보면 화가는 한물간 여인네를 그림 속에 구겨 넣은 것이 틀림없다고. 단순히 거기 살이 그려져 있으므로. 아, 그럼 이제는 15세기 화가들이 그린 그 힘차고 감동적인 여인들의 육체는 없는가.
…
그리고 싶으면 벗은 여인을 그릴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것이 <올랭피아>가 되어도 상관없다. 밝고 빛나는 부분의 필치, 화환과 어두운 부분의 흑인 여인과 검은 고양이, 이것들이 모두 무엇을 의미하느냐? 화가인 당신조차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내가 확실히 아는 한 당신은 훌륭한 그림을 그려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생생하게 이 세상을 풀어냈으며, 빛과 어둠의 진실, 사물과 인간의 실재를 고유한 문법으로 표현해냈다.”
평론가 케네스 클락Kenneth Clarke은 “얼마만큼 추상화했는가와 상관없이 누드가 관람자에게 약간이라도 성적 호기심을 유발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나쁜 예술이며 또한 잘못된 도덕이라 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의 말은 <올랭피아>에도 해당됩니다. 마네는 자신이 본 것을 그리겠다고 했으며 <올랭피아>에서 이런 의도가 충분히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빅토린을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본 그녀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는데 <풀밭에서의 오찬>에서나 옷을 입은 그녀를 모델로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네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옹호했습니다.
“난 본 대로 대상을 증명했을 뿐이다. <올랭피아>보다 더 자연스러운 장면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이 그림을 투박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투박하다. 나는 그렇게 보았다. 다시금 말하지만 난 본 대로 그린다.”
폴 세잔의 <현대판 올랭피아 Une Moderne Olympia>, 1869-70, 유화, 57-55cm.
세잔 특유의 환상의 세계를 시각화한 것입니다.
이 시기에 폴 세잔은 마네에 대한 경쟁심이 대단했는데 마네의 <올랭피아>를 주제로 자신의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세잔은 1873-74년에 다시 <현대판 올랭피아 Une Moderne Olympia>를 그린 것으로 봐서 마네의 작품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잔이 마네의 작품을 패러디한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경의를 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마네를 알고 있었고 존경했습니다. 평론가 루이 르루아Louis Leroy는 『르 샤리바리 Le Charivari』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습니다.
“자네는 이런 시간에 나더러 <현대판 올랭피아>에 관해 말하라는 건가? 쪼그리고 누운 추악한 여자의 몸에서 흑인 하녀가 베일을 걷어내는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는 저 한심한 친구! 혹시 자네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기억하는가? 그 작품은 세잔이란 자의 작품에 비하면 데생, 정확도, 마무리 등이 탁월한 걸작이지.”(1874.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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