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감성 - 통하는문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조지 클라우센 ‘들판의 작은 꽃’

다연바람숲 2013. 2. 4. 21:34

 

 

ㆍ꽃에 이끌린 소녀의 ‘노란 봄꿈’

이 세상은 매일매일 변하는 주가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투자자의 시선으로도 볼 수 있지만, 저렇게 한 송이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소녀의 눈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작디작은 꽃이 정말 아름답지요? 저 노란 꽃이 아름다운 건 아무래도 소녀의 시선 때문일 겁니다. 꽃에 홀린 소녀의 표정이 아니라면 저 작디작은 꽃이 저렇게 선명하게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꽃을 보는 소녀야말로 노란 꿈을 꾸고 있는 꽃입니다. 저 소녀가 말해주는 것 같지요? 뭔가 아름답고 생명 있는 것에 매료되는 미감은 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감각의 제국엔 나이도, 성별도, 국경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 그림은 김춘수의 ‘꽃’을 연상시키는 그림 아닌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소녀가 꽃에 매혹되어 잊을 수 없는 눈짓을 보내는 순간, 꽃도 소녀에게 매혹되어 모두가 별처럼 빛나는 겁니다. 꽃은 대지가 피워낸 별이고, 꽃에 빠져 있는 소녀는 대지의 별을 보호하려는 것 같습니다. 소중한 것을 보호하려는 소녀의 손짓과 표정에 내 심장이 뛰네요. 저 소녀는 몇 살일까요? 저 소녀는 우리 내면의 소녀란 생각이 듭니다. 생명 있는 것에 매료되는 순간 우리는 모두 소녀가 되는 거라고.

봄입니다, 자연이 생명 있는 것을 도발하는 봄, 봄! 아기의 속살처럼 부드러운 연둣빛 잎사귀에 싸여 봄꽃들이 피어납니다. 노란 꽃, 분홍 꽃, 흰 꽃, 보라 꽃들이 별처럼 피어납니다. 니체가 말했습니다. 봄날의 대지엔 젖과 꿀이 흐르는 것 같다고. 대지의 젖과 꿀이 꽃잎을 물들이고 마침내 소녀의 눈 속에 스민 그림이 저 그림입니다.

봄입니다. 자연이 인간을 도발하는 봄입니다. 담담하게 살려 해도 피부가 햇살에 반응하고, 눈이 나비처럼 피고지고 피는 꽃들을 따라다닙니다.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햇살 좋고 바람 좋은 봄날, 우울하게 방 안에 갇혀 있는 건 봄날의 자연을 모독하는 거라는 생각이 절로 찾아듭니다. 저 그림처럼 아름다운 꽃들이 문득문득 피어나고 문득문득 사라져 망연해질 틈도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들판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에 이끌려 저렇게 한눈을 파는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인지요? 저런 순간이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문이니까요. 그럼에도 왜 우리에게는 끌리는 대로 이끌리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까요? 삶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는 게 팍팍해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며 따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꽃이 질 거라고요? 지는 것이 무서워 정 주지 못 하겠다고요? 그거, 아십니까? 영웅이 감동을 주는 건 마지막 순간을 살기 때문이고, 꽃이 아름다운 건 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마지막 순간을 산다는 건 뒤를 남기지 않고 산다는 뜻이고, 진다는 건 온 힘을 다해 피었다는 뜻일 테니까요. 온전히 피어나면 시들어 죽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 충분히 사랑하면 좋은 이별을 할 수 있습니다. 존재이유를 실현하면 집착이 남지 않는 법이니까요.

농촌을 배경으로 자연에 기대 사는 사람들을 그렸던 클라우센 경은 화가로 작위를 받았을 만큼 여유 있는 삶을 살다 간 화가였습니다. 고흐처럼 비극적이지도 않았고, 고갱처럼 옥죄는 삶을 살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장식미술을 했는데, 우연히 아카데믹 화가로 명성이 자자한 에드윈 롱의 집을 장식하다가, 그의 눈에 띄어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거지요. 귀족으로서의 삶을 누리면서도 지지부진해지지 않고 자신을 잘 경영하는 인생들을 보면 삶이 희망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