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감성 - 통하는문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

다연바람숲 2012. 12. 11. 19:09

 

                                 르네 마그리트, ‘연인’, 1928년, 캔버스에 유채, 54×73.4㎝, 뉴욕 현대미술관

 

 

ㆍ완벽한 키스와 흰 보자기

사랑하며 사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소통이 안 된다고 느낄 때,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게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거란 사실을 새삼 깨달을 때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있지요? 그때 숨 막히는 연인에게서 돌아서십니까, 아니면 숨 막혀 죽어가며 죽어가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십니까?

숨 막히는 사람의 무게는 지옥의 무게입니다. 내가 본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은 사랑이 숨 막히는 열정이 된 자의 사랑의 얼굴입니다. 보십시오. 한번 보고 나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저 그림,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입니다. 열정에 이끌린 연인들이 둘만의 공간에서 완벽한 키스를 나누고 있지요? 그런데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모두 흰 보자기에 싸여 있습니다.

미친 듯이 사랑의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 보자기 위로도 그들의 팔딱거리는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맹목의 사랑이라 여기시겠습니까? 글쎄요, 그러기엔 흰 보자기가 그저 답답합니다. 눈을 감는 건 내면을 응시하기 위한 것일 수 있으나 보자기를 뒤집어쓴 건 누가 봐도 숨이 막히는 겁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저 그림에는 맹목적인 사랑의 허방이, 그 허방의 위태로움이 들어 있다고. 사랑하고 갈망하나 그럴수록 사랑에 배반당할 것 같은 두려움도 커지는 그런 사람의 사랑 말입니다. 사랑 내부에 존재하는 치명적 결함 때문에 운명적 인물이 된 그런 사람의 사랑 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심리적으로 편안하고 안정적일 때에만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상처에 시달리고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 그곳에서 곧잘 사랑에 빠집니다. 마디마디 아픈 우리의 사랑은 쉽게 좌절하고, 좌절이 많은 우리의 사랑은 곧잘 헛된 희망으로 들뜨기를 반복합니다.

사랑할 때 사랑하는 연인을 볼 것 같지요? 아닙니다. 저 그림을 보십시오. 상대를 향한 열정에 보자기가 씌워져 있는 저 그림이 왜 그리 인상적이겠습니까? 자기에 대해 맹목인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사사건건 자기 속에 갇혀 있었던 감정들이 올라와 철장을 만듭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A와 B는 부부입니다. A는 사랑의 이름으로 B의 친구를 하나하나 간섭합니다. A는 B와 친한 C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C는 이기적이고, 신의가 없는 나쁜 친구니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어쩌다 C를 만나고 오는 날은 한바탕 전쟁입니다.

사사건건 B에게 간섭하는 A의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애착이고 질투일 텐데, 그 질투와 애착을 사랑으로 여기는 것이 A의 흰 보자기 사랑이니 어쩌겠습니까? A가 흰 보자기 같은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이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C가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B를 믿지 못하는 내 사랑이 옹졸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사랑한다면서 그렇게도 ‘나’를 몰라준다고 놀라는 연인들, 그렇게도 나를 몰라주는 연인 때문에 무섭도록 전쟁을 치르고 좌절해 있는 연인들은 사실은 자기 때문에 좌절하는 겁니다. 그러니 핏줄 속에 흐르는 내 감정의 찌꺼기들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동맥경화를 막을 수 있습니다. 맹목적 사랑의 허방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저 그림은 언제 봐도 강렬합니다. 저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경험을 한 자가 이성(異性)에 대해, 사랑에 대해 품고 있는 화두를 그림으로 보여준 거라 느꼈으니까요. 그래서 르네 마그리트에게 관심을 가졌더니 역시나 그가 어렸을 적에 그의 엄마가 강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는데, 그 익사체가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연인에 대한 그의 이미지는 무섭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떨쳐내고도 싶고 다가가고 싶기도 했던 첫사랑 엄마에 대한 각주가 아니었을까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충격적 경험이 침묵 속에서 발효되어 만들어진 이미지가 바로 ‘연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아마 마그리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중에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본능적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천천히 곱씹게 됩니다.

'창너머 풍경 > 감성 - 통하는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에게로 또다시 - 서영은  (0) 2013.01.26
Tombe La Neige - Salvatore Adamo  (0) 2012.12.28
가을편지 - 박효신  (0) 2012.09.25
가을이 오면 - 서영은  (0) 2012.09.21
Rolling In The Deep - Adele  (0) 2012.09.10